조영건 진보당 고문(경남대 명예교수)이 지난 2020년 4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민중의소리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4.08 ⓒ민중의소리
평생을 민중과 함께한 조영건 진보당 고문(경남대 명예교수)이 7월 9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영건 고문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에 마련됐고, 발인은 12일 오전이고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며 장례는 노동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오는 11일 저녁 7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선 조영건 고문을 추모하는 시간이 마련된다.
조 고문은 경남대 경상대학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로 활동해왔고, 1960년 4·19혁명과 1979년 부마항쟁을 시작으로 2016년 광화문 촛불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거리에서 노동자 민중과 함께 싸워온 현대사의 산증인이었다.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새세상연구소) 이사장, 통합진보당 진보정책연구원 이사장과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진보당 당고문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진보정당 운동에 헌신해왔다. 아울러 구속노동자후원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감옥에 갇힌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해왔다. 민중과 함께 걸어온 그의 지난 삶을 돌아봤다.
스무살 청년 시절 마주했던 3·15 부정선거 투쟁과 4·19 혁명
지난 1940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그는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는 과거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대학에 들어가 보니 완전히 고시학원이었다. 나는 법 과목보다 문리대로 가 정치학과 강의를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서울대 58학번인 우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의 관료와 테크노클라트로 대거 영입됐다”며 “300명 중 230명이 고등고시(사법과·행정과)에 합격한 변절의 세대였다”고 말했다.
그가 ‘변절의 세대’라며 한탄할 수밖에 없었던 건 대학 3학년 시절인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와 마산의 김주열 열사를 거쳐 경무대 총격 현장까지 4·19 혁명을 둘러싼 역사적 현장에 함께했기 때문이다. 4·19 혁명의 배경이 된 3·15 부정선거 당시 그는 대학 4월 개강을 앞두고 마산 집에 머물고 있었다.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을,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각각 선출했고,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을,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각각 선출해 맞붙었다.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면서 부통령 선거에 관심이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열사 시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마산 시민들은 분노했고, 그러한 저항의 물결은 전국으로 퍼지면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기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 당선을 위해 세 사람 또는 다섯 사람씩 짝지어 기표하고 자유당 당원에게 검사받는 공개투표, 투표소 주변에서 민주당 지지자에게 위협을 주는 완장부대, 있지도 않은 사람을 유권자로 둔갑시켜 자유당에 투표하게 하는 유령유권자 조작을 통해 총 유권자의 40%에 달하는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4할 사전투표 등 갖가지 부정이 벌어졌다. 당시 마산에선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개표장이 있던 마산시청 주변에서 벌어졌다. 그는 2020년 4·19혁명 60주년을 맞아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컸다. 학교 선생 집집마다 방문해 이승만 투표를 강요하던 시절이니 청년들이 어떠했겠나. 개표장이 있던 마산시청 인근에 우리 집이 있었다. 개표장에 시민들이 밀집했고, 나도 결합했다. 개표장 불을 끄고, 대로에 바리케이트를 쌓으며 부정선거에 항의했다. 그러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고, 발포도 일어났다. 십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상했다. 당시 외신들은 한국의 동남의 항구도시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났다고 크게 보도했지만. 국내 언론은 ‘공산당의 사주’라고 왜곡 보도를 했다. 당시 정권은 도립병원에 안치된 시체에 ‘삐라’를 넣기도 했다.”
그는 이후 개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지만, 마산에선 역사를 바꾼 사건이 이어진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마산 시민의 항쟁 당시 한 중학생이 실종됐다. 남원에서 올라온 어머니는 아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4월 11일 마산 부두에서 아들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눈에 최루탄이 박혀있는 처참한 모습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그가 바로 김주열 열사다.
“4·19혁명 당시 경무대 시위에서 옆에 있던 중학생이 총에 맞았다 중학생을 부축해 환자후송에 나섰고, 그 장면이 카메라에 담기게 됐다”
시위의 불길은 4월 19일 본격적으로 타올랐다.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속출하는 등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1960년 4월 19일 오후 2시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하고 있었다. 이때 경찰의 발포가 이어졌고, 현장에 있던 한 중학생이 총에 맞았다. 주변에 있던 대학생들이 총에 맞은 중학생을 급하게 부축해 병원으로 옮겼다. 이 장면은 외신 기자의 카메라에 담겨 해외에 보도되는 등 4·19를 상징하는 사진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이 역사적인 현장 조 고문이 함께 있었다. 그는 외신에 사진으로 보도된 그날 경무대 앞 사건에 대해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9일 아침 당시 서울대 교정이 있던 동숭동(대학로)에서 서울대 학생들이 모여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으로 행진했다. 11시에 도착하니 사방에서 대학생과 시민이 운집해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1시경 열혈 시민들이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로 진출했다. 나도 마산 출신 친구들과 함께 경무대로 향했다. 군대 갔다 온 청년들이 중심이 돼 차를 탈취해 청와대로 진격하는 등 시위가 거세지자 경찰이 총격을 가했다. 많은 사람이 총탄에 쓰러졌다. 그 현장에서 옆에 있던 중학생이 총에 맞았다. 중학생을 부축해 환자후송에 나섰고, 그 장면이 카메라에 담기게 됐다.”
1960년 4월 19일 경무대로 향하던 시위대를 향해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현장에 있던 중학생이 부상을 당해 현장에 있던 대학생과 학생들이 환자를 이송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서 세번째가 당시 서울대 법대 3학년이던 조영건 경남대 명예교수다. ⓒ기타
그날 거리에서 민중의 분노는 요동쳤다. 조 고문에 따르면 지금 KT 자리에 있던 반공회관과 사실상 정부의 기관지나 마찬가지였던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서울신문사가 시위대에게 공격하는 등 반공통치에 대한 저항이 퍼져갔다. 그리고 4월 26일 결국 이승만이 하야했다.
“4·19 혁명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시발이었다 식민지 피압박에서 벗어나 이룬 민족민주 대혁명이고 민족주의 자유주의 혁명이었다 해방 이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자주 국가와 민주사회를 만드는 전환기 혁명이었고, 민중을 동원해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혁명이었다”
이승만이 물러나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우리는 흔히 4·19 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을 이뤄낸 주체는 대학생 등 민중이었지만, 이후 집권했던 민주당 세력은 친일세력 출신이 다수였던 기득권 세력으로 혁명 주체 세력과 괴리가 컸다. 더구나 당시 민주당 내부도 신구파로 갈려 싸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민중의 바람을 받아안기엔 부족했기 때문이다. 4·19 혁명 이후 1년이 조금 넘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벌인 쿠데타에 의해 이런 바람은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주, 민주, 통일 그리고 국민주권의 공화국 등 지금까지 도도히 이어지는 민중적 흐름을 형성했다. 그는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4·19 혁명이 가진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자유당 중앙부터 지방조직에 이르기까지 다 해체됐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관료가 다 척결됐다. 이승만의 어용기관이던 대한노총 와해되고, 민주적 노동자 조직의 싹이 텄다. 전국의 민중, 농민조직이 개편됐다. 4·19 혁명을 단순히 시민혁명 차원서 보는 시각이 많지만, 4·19 혁명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시발이었다. 식민지 피압박에서 벗어나 이룬 민족민주 대혁명이고, 민족주의 자유주의 혁명이었다. 해방 이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자주 국가와 민주사회를 만드는 전환기 혁명이었고, 민중을 동원해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혁명이었다. 4·19 혁명은 학생혁명, 농민 노동자 혁명, 민중혁명의 3단계 혁명으로 전개됐다.”
하지만, 이런 학생들의 열망과 민주공화국을 향한 수많은 꿈은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좌절되고 말았다. 그렇게 마침표를 찍지 못한 4·19 혁명의 미완의 과제는 이후 조 고문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삶에 있어 지표가 됐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군복무를 마치고, 1960년대 후반 한국노총에서 출간한 ‘한국노동운동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서양사학자인 건국대 강동진 교수가 해방 이전 노동운동사를 맡았고, 그는 해방 이후 노동운동사를 썼다. 강 교수의 권유로 그는 건국대 대학원에서 서양사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1971년부터 건국대에서 시간강사로 일한 그는 강의 도중 시국 발언을 했다는 등의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기도 했고, 끝내 강사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경남대 교수 부임직후 만난 1979년 10월 부마항쟁 “유신과 독재 종식의 분수령”
이후 경제사로 전공을 바꿔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75년 청주대 전임교수를 거쳐 1979년 3월 고향인 경남대에 경제사 교수로 부임했다. 경남대 교수로 부임한 그해 10월 그는 운명처럼 부마항쟁을 마주했다. 박정희 정권의 폭압이 극에 달했던 그때 부산과 마산에선 대학가를 중심으로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며 거센 저항의 물결이 일었다. 특히 경남대가 있던 마산에서 저항이 거셌다. 학생들은 물론 노동자와 시민까지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섰다. 당시 시위에 나선 그의 제자들은 경찰에 끌려갔고,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부산과 마산의 항쟁은 이후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불러온 불씨가 됐다. 그는 이때의 인연으로 1989년 부마항쟁 10주년을 맞아 설립된 부마항쟁기념사업회 공동대표에 추대됐다. 조 고문은 지난 1999년 경남신문과 인터뷰에서 “부마항쟁, 특히 마산항쟁은 60, 70년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을 총결산하고, 유신과 독재 종식의 분수령이었다”고 부마항쟁을 평가했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마산역에 모인 시민·학생 시위대 행렬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조 고문은 경남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82년 경남대에 노동복지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진 노동문제 전문 기관이었고, 지역에선 처음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개발경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에서 불거지는 여러 노동문제를 연구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경남대 상경대 학장, 영국 런던대 연구교수,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사범대 강의교수, 상하이 푸단대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아울러 한국경제사학회 부회장, 한국사회경제학회 회장,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 몽양 여운형기념사업회 고문 등 여러 활동을 이어왔다.
1988년 서울대 김진균·부산대 하일민 교수 등과 함께 ‘사월혁명연구소’를 만들고 오래도록 소장으로 활동했다. 사월혁명연구소는 이후 사월혁명회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90년 만든 6월항쟁기념사업회 공동대표로 활동했으며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그는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공동대표, 6·15 공동선언 학술위원회 상임공동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통일운동도 이어왔다.
그는 구속노동자후원회 후원회장을 맡아 노동운동과 각종 사회운동 과정에 구속돼 고난받는 노동자들의 든든한 동지가 되었다. 그는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평생 대학교수로 살아온 나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제 중늙은이가 되어 구속노동자후원회 일을 하며 그 빚을 갚고 있다”고 고백했다. 때문에, 그는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 양심수후원회, 구속노동자후원회 등이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열린 ‘목요집회’에 늘 함께했다.
“왜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는가? 그것은 50년대 조봉암 선생이 어떻게 ‘법살’됐는지 어떻게 이 땅에서 진보정당의 꿈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진보정당’이다. 그는 우리나라 진보정당 운동의 증인 가운데 하나다. 그는 1999년 진보정당 창당준비위원과 창당발기인, 당명제정위원장 등으로 참여하며 민주노동당 창당에 힘을 보탰다. 2006년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이후엔 민주노동당 부설 정책연구원인 진보정치연구소와 새세상연구소 이사장, 통합진보당 진보정책연구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진보당 고문으로 활동해왔다.
2011년 1월 27일 열린 민주노동당 창당 11주년 기념식에서 발언하고 있는 조영건 당시 당고문. ⓒ진보정치
그에게 진보정당은 아주 오래된 꿈이었다. 그는 지난 2006년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와 인터뷰에서 “제가 왜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는가? 그것은 50년대 조봉암 선생이 어떻게 ‘법살’됐는지 어떻게 이 땅에서 진보정당의 꿈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2009년 진보정치와 인터뷰에선 “진보당 강령을 읽어보면 지금과 비교해서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고민이 담겨있다. 진보정당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며 “민주노동당이 진보당을 계승하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조봉암 선생은 1957년 10월 진보당 기관지 ‘중앙정치’ 창간호에 ‘평화통일에로의 길’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고 조국의 평화적통일방도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정치지도자회의’의 소집을 제안했다. 또한, 조봉안 선생은 ‘평화통일에 필요가 있고 유익하기만 하면 공산블럭과 회의도 하고 협상도 해야 한다’는 당시로선 혁명적인 주장을 내놓으며 이승만의 북진통일과 분단고착화론에 격렬히 저항했다. 1950년대 중후반은 미국이 북한핵 소동을 일으키며 이를 명분으로 주한미군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던 위험천만한 시절이었지만, 조봉암 선생은 당당히 맞섰다. 조 고문은 “죽산선생의 평화통일론은 유엔감시하의 평화통일이고. 동시에 핵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주장이었다”고 말했다.
1956년 5월 대선에서 조봉암이 엄청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코끝을 위협할 정도의 엄청난 표를 모은 것은 ‘평화통일론’과 ‘피해대중 단결론’이었다고 조 고문은 설명했다. 그리고 조봉암이 죽은 이유는 그가 너무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승만으로서는 불법선거로도 다음 선거에서 이길 재간이 없다는 확신을 줬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 회장이 2018년 7월 19일 오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1180회차 민가협 목요집회 815 대사면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또한, 그에게 진보정당 운동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해방 직후 꿈꿨던 세상을 이루는 길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 남한에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설립을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당시 국민학생이던 그는 담임이었던 여성 교사가 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기억도 있다. 2006년 ‘진보정치’와 인터뷰에서 그는 “노동자 농민 말고도 당시 지식인이나 부유층, 자산가들, 부호 상인들이나 기업하는 사람들도 다 지배적인 분위기가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에 가입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엄청난 지지세였지만, 이들의 꿈은 좌절됐고, 한국전쟁 직전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학살당했다. 이때 좌절된 꿈은 그가 진보정당 활동에 힘을 쏟게 하는 계기가 됐다.
“형편없는 헛바퀴 시속을 이겨낼 힘이 좀 부친다 그러나 든든한 버팀목 후대가 있다 청년의 강건 분투에서 힘 받는다 현재는 전진하고 낙관의 미래를 나는 확신한다”
조봉암을 기억하고, 여운형을 기억하고, 4·19혁명과 부마항쟁 등 수많은 민중의 투쟁을 기억하기에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부지런히 움직였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지난 1일 새벽 그는 페이스북에 마치 유언과도 같은 글을 남겼다. 84년의 세월을 쉼 없이 달린 그는 청년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낙관의 미래를 확신하면서 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사람의 몰골은 건강과 심기의 거울이다. 싱싱 팽팽 얼굴 수삼 년간 팍삭 상했다. 벗들도 동지들도 연이어 세상을 뜬다. 살아있는 동배도 많이들 쪼그라들었다. 년륜과 의지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형편없는 헛바퀴 시속을 이겨낼 힘이 좀 부친다. 그러나 든든한 버팀목 후대가 있다. 청년의 강건 분투에서 힘 받는다. 현재는 전진하고 낙관의 미래를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