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은 오랫동안 인권, 법치주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 국제 안보와 평화의 유지를 내세우며 글로벌 규범과 질서를 주도해 왔다. 서방이 사실은 여러 나라의 내정에 개입하고, 비민주적인 정권의 창출과 유지에 큰 역할을 하고 적대국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전쟁을 벌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이 명분으로 내건 내러티브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2020년대에 들어 이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다. 그렇게 실제와는 다른 허구, 즉 '포템킨 마을'인 서방의 내러티브가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미들이스트아이의 기사를 소개한다.
포템킨(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포템킨 타브리체스키)은 여제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러시아 제국의 정치인, 관료, 군인이었다. 포템킨은 1787년 여제가 새로 합병한 크림반도 시찰에 나섰을 때, 그녀가 배를 타고 지나갈 드네프르강을 따라 주변의 누추한 풍경을 감추기 위해 아름다운 마을을 그린 나무판을 강변에 줄지어 세워놓고 여제의 눈을 가렸다. 이후 ‘포템킨 마을’은 실제의 추한 모습과 딴판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을 일컫는 표현이 됐다. 젊은 세대는 영화 ‘트루먼 쇼’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서방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과 서사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포템킨 마을을 구축해 왔다. 오늘날에도 서방은 모든 것을 민주주의와 독재의 투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들의 포템킨 마을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그 조짐은 명확하다.
우선 조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 간의 참담한 대선후보 토론 이후 미국 민주당은 바이든이 11월 대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바이든의 인지력에 문제가 있음은 정계 내부에서 이미 수년 전부터 공론화된 얘기였지만 민주당과 안일한 언론이 이 사실을 은폐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속임수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는] 이코노미스트도 바이든을 다룬 지난주 기사의 첫 문장에서 ‘은폐’라는 용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들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4년 동안 속이고 가스라이팅했다... [민주당이] 바이든의 능력에 대한 허구를 만들고 퍼뜨리면서 그것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어 유권자와 민주주의 자체를 얼마나 멸시하는지 드러났다’고 보도하며 민주당과 정계의 현실 왜곡을 가차 없이 정리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
권력 유지를 목표로 하는 체제가 소위 ‘포퓰리스트’를 비난하고 비방하는 것이 앞으로도 가능할까? ‘트럼프로부터 민주주의를 구해야 한다’는 논리를 계속 면죄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자기네가 실천하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면서 말이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을 것이다. ‘미국을 누가 이끌고 있는가?’ 답은 명백하다. 정치자금을 공급하는 고액 기부자와 워싱턴 관료들이다. 의도로 보나 목표로 보나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가 아닌 위선적인 과두제이다.
안타깝게도 가스라이팅과 기만이 미국 정치 시스템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난달 유럽 의회 선거에서 유권자는 지도자에게 분명한 불만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EU 지도자들은 유권자를 무시하고 서둘러 우르술라 폰 데어 라이엔을 EU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재신임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는 듯 그들은 러시아를 인종에 따라 여러 국가로 분할하는 것이 목표라고 공공연하게 말해 온 에스토니아 총리 카야 칼라스를 외교 담당 고위 대표로 임명했다. 러시아와의 끝없는 갈등을 보장한 것이다.
EU 지도자들이 그들의 포템킨 마을 안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을 때 영국 노동당은 지난주 총선에서 약 33%의 득표율로 60%의 의석을 배정받았다. 키어 스타머가 이끄는 노동당은 제레미 코빈이 이끌 때에 비해 수백만 표 적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승이라고 떠들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를 저지하는 것 빼고는 모든 생각이 다른 중도좌파 연합이 마린 르 펜의 국민연합의 집권을 현명하게 막았다. 그 결과 현재로서는 의회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앞으로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당이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리더 장뤼크 멜랑숑과 함께 통치할 수 있겠는가?
기만과 가스라이팅
독일에서는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의 ‘신호등 연정’이 약 30%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재군비무장과 탈산업화를 동시에 수행하는 모순된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극우 성향의 이탈리아형제들(Fdl)이 포템킨 마을의 묘사에 굴복하고서야 집권에 성공했다.
한편,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의 효과에 대한 가짜 뉴스가 2년 넘게 이어진 끝에 세계은행이 러시아를 상위 중소득 국가에서 고소득 국가로 승격했다. 또 러시아가 유럽의 존립을 위협한다는 협박을 2년 동안 이어가면서 유럽이 군사비를 대폭 증액했지만, 뉴욕타임스도 최근 미국 정보 평가를 인용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현재의 갈등을 우크라이나 너머로 확장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만과 가스라이팅에 관해서는 중동 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스라엘이 대학살을 개시한 10월 7일 이후 서방에서는 단 하나의 서사만 허용됐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스라엘이 수십 년간 팔레스타인 땅을 무자비하게 점령한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가장 잔혹한 방법을 이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고,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포템킨 마을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방 사람들마저 이스라엘의 ‘방어권’이 거의 일방적인 복수를 실행하기 위한 면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서방은 이스라엘이 ‘가장 도덕적인 군대’와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주의’를 지니고 있다는 서사에 집착해 왔지만 세계의 최고 법률 기관에까지 도달한 전쟁 범죄와 집단 학살의 현실로 그 허상이 드러났다.
늘어나는 도전 과제
포템킨 마을의 군사인 나토(NATO)는 3차 세계 대전의 위험이 있어도 경쟁자와 직접적으로 대치해야 한다며 그 필요성과 불가피성을 계속 주장한다. 임기를 마치고 곧 떠나는 옌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이 그랬듯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중국이라고 비난하며 또다시 현실을 또 왜곡하고 과장하며 공포를 조성해 서방의 정책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서방의 단합된 모습과 리더십도 허상임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주에 긴장감 넘쳤던 2018년 나토 정상회의의 뒷이야기를 하나 공개했다. 당시 트럼프는 다른 회원국들이 군사 지출을 늘리지 않으면 NATO에서 철수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작은 룩셈부르크만이 그에게 반발했다는 것이다. (유럽의 다른 지도자들이 얼마나 배짱이 없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얘기다).
1980년대 대처와 레이건의 주도로 전통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대체됐다. 신자유주의의 과두제는 초금융화된 경제를 형성해 엄청난 세계 부채와 극단적인 불평등을 초래했다. 이제 그것이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40년 이상 지속된 지금, 아무리 강력한 사람이라도 개인보다 공동체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사회가 서서히 만들어졌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실물 경제가 금융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이 실물 경제를 지원하는 역할로 복원될 것이다.
과두제의 금융 엘리트와 첨단 기술 CEO가 이 복잡한 세계를 관리할 기술과 자산을 독점적으로 소유해도 된다는 삐뚤어진 사고방식은 미국과 유럽의 대중에 의해, 더 넓게는 글로벌 사우스에 의해 점점 더 도전받고 있다. (이것이 서방의 포템킨 마을 관리자들이 중국과 러시아 등의 국가를 그렇게 싫어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이들은 말도 안 되는 허구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거부했다).
포템킨 마을을 허무는 싸움은 권력 투쟁이면서 지적 논쟁이다. 팔란티어의 CEO 알렉스 카프는 최근 가자대학살에 대한 대학생 시위에 대해 ‘우리가 지적 논쟁에서 지면, 서양은 앞으로 어떤 군도 배치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성공한 첨단 기술업계의 억만장자와 같은 과두제 지배층은 이렇듯 내러티브와 서사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지배권층이 지적 논쟁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그들이 다시 이기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