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의 발전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음악도 만들고, 인공지능과 협업 과정을 거친 소설도 등장한다. 인간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한 휴머노이드 로봇은 학습이 가능한 인공지능을 장착하고 우리 앞에 등장했다. 가상공간 메타버스도 새로운 차원의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초고속으로 변화하는 현실에서 연극 ‘전기 없는 마을’은 먼 미래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한 10년 정도 이후의 세상 같다. 그 느낌은 뭐랄까? 섬뜩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연극 ‘전기 없는 마을’은 국립극단 작품 개발사업을 통해 김연민 연출이 1년간 개발하여 선보이는 작품이다. 발전하는 과학 문명으로 소멸해가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축인 이 작품은 독립된 것처럼 보이는 세 편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는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와 만나고 비로소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 구성이다.
세 이야기가 만나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첫 번째는 소멸이 예상되는 마을을 찾아 전기망을 끊는 일을 하는 이든과 재이의 이야기다. 세상은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더 많은 데이터를 위해 데이터 센터가 만들어지고 있다. 전기가 부족해지니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전기를 차단해야 하고 이든과 재이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멸은 마을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이든에게 온 마지막 명령은 바로 자신의 전기를 차단하라는 것이다.
이든과 재이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또 다른 존재, 기준과 재하의 등장으로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재하는 디지털 트윈에 이스터 에그로 만들어둔 인물이 소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이든의 소멸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이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결말을 맺게 되자 이든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한 번도 벗어나 보지 않았던 곳을 떠나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하기를 결심한다.
연극 '전기 없는 마을' 공연 사진 ⓒ국립극단
다른 듯 연결된 이 이야기는 세 번째 이야기로 이어진다. 소멸되기 직전인 마을에 사는 영란과 영란의 곁을 지키는 원식의 이야기다. 생명유지 장치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영란은 이 마을의 전기가 언제 끊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낸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영란 앞에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나온 재하가 나타난다. 영란은 젊은 날에 아이를 잃었고 그 아이의 커 가는 모습이 보고 싶어 DNA 데이터를 활용하여 새로운 존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로소 전체 이야기의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다.
과학 개념과 연극의 만남
작, 연출을 맡은 김연민 연출은 작품 개발 리서치 과정에서 다양한 과학 개념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뉴턴의 제3법칙, ‘어떤 시스템의 특정한 물리적 속성(위치, 운동량, 에너지 등)은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양자역학의 불확실성 원리, ’이 세상은 계속 무질서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법칙)들이 그것이다.
과학 개념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소멸과 순환이라는 삶의 철학으로 돌아온다. 발전된 과학 문명은 불필요한 것을 제거한다. 효율적인 전기 사용을 위해 소멸하는 마을의 전기를 끊고 그 마을은 소멸한다. 하지만 소멸된 공간에는 다시 자연이 자리를 메우게 된다. 그러니 영원한 것은 없기도 하지만 있기도 한 셈이다.
연극 '전기 없는 마을' 공연 사진 ⓒ국립극단
’전기 없는 마을‘이 그리는 미래는 인류를 포함한 세계의 정보를 데이터화하여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든도 제이도, 재하도 잘 짜인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속 존재들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정교한 프로그램이라도 확정된 결과를 만들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그 예외 속에 이든이 있고 재하도 있다. 영란이 죽은 아이를 대신해 만든 재하가 만들어낸 프로그램 속 이든과 재이가 다시 영란이 살고 있는 마을의 전기를 끊는 업무를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로로 길게 쓴 무대는 풍성한 공간감을 준다. 하지만 관객은 시야에 한 번에 들어오지 않는 무대 좌우를 열심히 돌아봐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이야기의 배경이 현실이라기보다 가상세계에 가깝고 오늘날보다 더 핵 개인화된 미래의 세상이란 전제로 보면 이 같은 물리적인 거리는 심리적인 거리감으로도 다가온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영리하게 오고 가는 배우들의 연기 역시 관객에게 즐거움을 준다. 영란 역에 배우 강애심, 이든 역에 배우 윤성원, 기준 역에 배우 정원조가 무대에 오른다. 재이 역에 배우 이다혜, 재하 역에 배우 최하윤, 원식 역에 배우 홍선우는 국립극단의 시즌 단원으로 개성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인간인 듯 인간 아닌 새로운 존재들이 펼치는 연극 ’전기 없는 마을‘은 8월 4일까지 홍익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연극 ’전기 없는 마을‘
공연 날짜 : 2024년 7월 11일(목) ~ 8월 4일(일) 공연 장소 :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공연 시간 : 평일 19시 30분 / 토, 일 15시 (월요일 공연 없음) 러닝타임 : 80분(인터미션 없음) 관람 연령 : 12세 이상 관람가(2012년 12월 31일 출생자까지) 창작진 : 작, 연출 김연민/무대디자이너 남경식/조명 디자이너 성미림/소품 디자이너 윤미연/영상 디자이너 오죠/영상감독 전석희/음악감독 장승현/음향 디자니어 김정호/분장 디자이너 김근영 출연진 : 이다혜, 윤성원, 최하윤, 정원조, 강애심, 홍선우 티켓 예매 : 국립극단, 인터파크 문의 :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