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상병 순직 사건 수사 결과와 관련해, 경찰청이 수사심의위원회 명단을 비공개하고 나섰다. 지난 1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야당 의원들은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을 불송치하기로 결정한 경찰 수사심의위원회(수심위) 명단을 공개하라’고 요구했지만, 윤희근 경찰청장은 “수심위 명단을 공개하기 시작하면 제도의 운영 취지가 무너진다”며 “수심위는 공정성과 객관성이 최고의 가치인데, 위원 명단이 공개되면 이분(위원)들은 이후에 수심위에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심위 명단은 ‘비공개가 원칙’이고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면서, 경찰이 아닌 검찰에서 비슷한 사례로 수심위 비공개 판례가 있다고 근거를 들었다.(해당 판례의 사건번호나 판결문 내용은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이후 언론보도를 통해 작년 8월 오히려 경찰의 수심위 명단을 공개하라는 서울행정법원의 2심 판례가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경찰에서는 대법원에서도 공개 판례를 남기게 될까봐 항소를 고심하고 있다는 정황이 알려졌다. 윤 청장은 “보도를 보고 알았고, 제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면서 변명했지만 여전히 명단은 비공개하고 있다.
현재 경찰청 홈페이지에 공개된 ‘비공개 세부기준’에는 수사심의회명단이 정보공개법 9조 1항 4, 5, 6호에 해당하여 비공개 대상 정보라고 안내하고 있다. 4호는 수사 등에 관한 사항으로 공개 시 진행 중인 재판에 있어 공정성을 침해할 우려가 현저한 정보, 5호는 의사결정 과정 중에 있는 사안으로 공개 시 업무수행의 공정성을 침해할 우려가 현저한 정보, 6호는 개인정보로서 개인의 민감한 정보나 사생활이 노출될 우려가 현저한 정보를 뜻한다.
하지만 기관이 자체적으로 정하는 비공개 세부기준은 어디까지나 지침일 뿐, 법령과 같은 수준의 원칙이 아니다. 한국 뿐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의 정보공개제도는 모두 공공정보에 대해 공개가 원칙이고 비공개가 예외임을 명시하고 있다. 국민의 참여와 국정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의 취지상, 비공개 정보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공개됨으로써 위원들이 처할 위험이나 공정한 업무수행에 지장이 발생할 우려가 구체적이고 커야만 한다.
2008년 사면심사위원 명단공개소송 대법원 “비밀리에 이루어져야만 그 업무를 공정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볼 수 없어”
16년 전인 2008년 경찰과 동일한 주장으로 위원회 명단을 비공개 했던 사례가 있었다. 대통령의 권한으로 매년 이뤄지는 특별사면을 상신하고 심의하는 ‘사면심사위원회 명단’을 시민단체가 정보공개청구하자 법무부가 비공개한 것이다. 해당 소송(2008구합31987)은 대법원까지 이어졌고, 쟁송 끝에 공개 판결을 받았다.
당시 법무부에서는 4,5,6호와 함께 3호, 공개될 시 개인의 신체와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주장까지 더해 비공개 근거를 제시했다.
재판부는 사면심사위원이 누구인지 공개한다고 해서 위원 9명 중 누가 어떤 의견을 제시하였는지를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특별사면 결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아무 위원에게나 폭언·협박 등의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가정은 너무나 막연하고 추상적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사면심사위 위원의 명단과 약력은 형 집행이나 재판에 직접적으로 연관 되는 정보도 아니며 그것이 공개된다고 하여 집행기관인 검사의 직무수행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우려도 없다는 점, 위원회 위원과 같은 공직 신분을 사생활의 비밀이라고 할 수 없고, 해당 신분이나 담당 업무가 일반에 알려진다고 하여 사생활의 자유가 침해된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점을 들어 비공개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한편 현재 경찰의 주장과 비슷하게 당시 법무부는 “사면심사위 위원들이 누구인지가 일반에 공개될 경우 위원들이 광범위한 여론 및 로비에 노출되어 심사 과정에서 솔직하고 자유로운 의사 교환이 어려워”지며, “비난 여론에 대한 부담으로 아예 침묵으로 일관할 가능성이 높아 사면심사 업무의 공정한 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특별사면 상신이 적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심사·자문을 하는 사면심사위의 기능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위원들에 관한 정보가 감추어진 가운데 비밀리에 이루어져야만 그 업무를 공정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일갈했다.
위원회의 인적 구성상 “4인 이상의 위원들이 광범위한 외부의 여론 및 로비에 노출될 수도 있고 이로 인하여 심사 과정에 어느 정도 책임과 부담을 느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러한 우려는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외에도 부당한 외부 여론이나 로비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공정하면서도 중립적인 위원들로 사면심사위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문제일 뿐, 위원들에 관한 신상정보를 일절 공개하지 않아 국민적 관심이 큰 특별사면 등에 대한 심사 과정이 밀실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위원들로 하여금 심의 결과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과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함으로써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 경우에는 대통령의 자의적인 사면권 행사를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국민들의 여망으로 탄생한 사면심사위가 대통령의 특별사면권 행사에 대하여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합법성을 부여하는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될 위험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사면심사위는 속기록은 5년 이후에 공개하도록 하고 있지만 명단은 위촉 즉시 공개하고 있다.
민간 참여 보장하고 공정성·투명성 높이자는 취지 무색한 수심위 명단 비공개
해당 재판에서 나온 또 한 가지 중요한 판결 내용은 “국정 수행에 대한 국민의 건전한 비판은 장려되어야 하며,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통하여 형성된 여론에 의한 민주적 통제가 오히려 사면권의 적정한 행사에 기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사면 결과에 관한 대대적·집중적인 비난 여론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이 사건 정보의 공개를 거부할 정당한 사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수심위는 학계· 법조계·언론계 등 사회 각계 민간 전문가들의 경찰 수사에 대한 참여를 보장하고, 경찰 수사의 공정성·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경찰청 및 전국 18개 시도경찰청에 설치된 기구다. 경찰의 고유 권한을 나누고 견제하기 위한 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숨기는 것이 어떻게 공정성을 담보될 수 있을까. 효율적인 업무면 몰라도 공정한 업무는 숨긴다고 보장되지 않는다. 시민들의 건전한 비판과 민주적 통제가 가능할 때, 공정성도 투명성도 보장된다.
사실 윤 경찰청장의 발언은 본인들의 결정 과정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행정에서 되풀이하는 전형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주요한 사회적 결정을 위한 심의/자문 위원회 명단은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 이미 십수 년 전 있었던 대법원의 판단이며, 이에 따라 이미 수많은 자치단체와 기관들이 위원들의 이름과 소속, 약력을 공개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