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1951년 3월 31일 시작한 김민기의 삶이 2024년 7월 21일 중단되었다. 그가 거인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 자신뿐이었을 것이다. 세상 모두가 아는 그의 작품과 활동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들, 오래도록 적이었을 이들조차 그의 죽음 앞에 머리를 숙이게 만들었다.
음악이 대개 유희이거나 감정의 발산이었던 시절, 김민기의 노래는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뿐 만은 아니라고 개안하게 하면서 통념의 방향을 틀었다. 물론 그 이전에 고발이거나 성찰이 된 음악이 없었다고 말하는 건 그에 대한 지나친 신화화다. 그 역할을 혼자 다 했을 리 만무하다. 그 이전에도 이 땅에는 진지한 음악을 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고뇌하던 음악인들이 있었다. 김순남이나 한대수 같은 이들만이 아니다. 방의경, 서유석, 송창식, 양병집, 양희은을 비롯한 이들이 함께 통기타를 들고 포크의 시대를 일구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처럼 노래한 사람은 그 이전에도 드물었고 그 이후에도 희귀했다. 1971년에 내놓은 그의 첫 독집을 들어보라. ‘친구’로부터 시작해 ‘눈길’로 끝나는 10곡의 노래에서 도드라지는 면모는 저항정신만이 아니다. 형형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청년의 얼굴로 그는 삶을 보듬고 고뇌하며 낭만뿐인 순수와 다른 태도를 선보였다. 자신의 내면만 향하지 않은 노래, 고단한 세상을 외면하지 않은 노래, 고통을 껴안고 꿋꿋해진 노래는 소박하고 진실하며 견결한 인간을 우리 앞에 등장시켰다. 그 후 50년이 넘도록 이 노래와 다르지 않은 태도로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등불이 된 노래는 1집부터 거창하지 않은 일상의 한국어로 피어났다. 사실 그의 첫 음반은 정성조라는 전문 음악인의 도움을 받았지만, 음악이 문학이나 미술, 연극을 비롯한 장르 예술만큼의 사유와 인식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 놀라운 작품집이었다. 새로운 장르의 시작이자 새로운 인간의 출발이었다. 새로운 태도의 씨앗 가운데 하나였다.
그 후 그에게 어떤 시간이 펼쳐졌는지는 우리 모두 안다. 자초하지 않은 고통, 권력과 체제가 빼앗은 자유가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는 어느정도 알려졌다. 그의 위대함은 그 긴 시간이 만들어냈다. 아니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라고 노래한대로 살아버린 그 자신이 만들어냈다. 그는 계속 노래를 만들었고, 불렀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공장의 노동자들과 어린이들과 지하철 1호선 주변의 창녀와 깡패가 있는 곳이었다. 그들을 노래했고, 그들과 함께 노래했다. 가르치려 하지 않은 노래는 그들의 삶보다 앞서지 않았다. 그에게 배웠으나 이념의 세례를 받은 후세대들은 노래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그저 품고 고뇌하고 견디면서 뒤에서 자신의 길을 갔다.
노래극 작업에 몰두하고, 배우를 길러내고, 공연 예술가를 위한 무대를 지키는 동안에도 그는 작품으로만 말했다. 인터뷰와 방송 출연을 비롯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극도로 회피한 그는 PR과 마케팅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비켜 서 있었다. 아니 그는 첨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이전의 인간처럼 살았다.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간판과 학연, ‘아침이슬’이라는 노래의 무게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음에도 그는 대개 수줍고 부끄러워하는 소년처럼 보일 뿐이었다. 유명한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가 끝날 무렵에야 조용히 찾아오는 그의 성정, 좀처럼 무대에서 자신의 노래를 부르지 않은 태도를 겸손이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는 유행에 떠밀려가고 명성에 잡아먹히는 문화예술계에서, 그래야 버틸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타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티내지 않았다. 추문이 없는 거장, 권위를 내세우지 않은 거장, 자신의 역사를 팔지 않은 거장이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고집스럽게 이어가는 현장의 예술가였다. 그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만큼 행복했으리라 믿는 이유다.
거짓과 싸우고 삶을 지키는 김민기의 예술은 계속 이어졌다. 위대한 가치와 예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예술가와 기획자를 착취하지 않은 예술. 시대가 변했다고 가던 길을 버리고 돌아서지 않는 예술의 길을 이어간 그는 자신의 노래처럼 살면서 자신의 노래를 지켜냈다. 끝내 그의 노래에 감동받았던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태도로 노래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꽃다지, 안치환, 정태춘만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노래에 깃든 마음과 정신처럼 노래하고 작업하며 살아간다. 수많은 음악인들의 노래에는 그의 노래가 민들레 홀씨처럼 박혀있다.
하지만 분단의 철조망을 응시하다가, 어린 날 키웠던 백구를 떠올리는 음악인과 예술가는 드물다. 성매매여성과 어린이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예술가가 얼마나 있는가. 다정한 마음과 크낙한 시선을 동시에 품은 음악인의 부재는 김민기의 빈 자리를 드러낸다. 그를 애도하고 추억하고 기리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작고 낮은 시선과 시대의 모순을 응시하는 태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잇는 일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이 지쳐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함께 즐겁게 작업하고 꾸준히 이어가는 일이다. 지금 김민기처럼 노래하고 작품 만드는 이들을 지키는 일이다. 김민기 또한 그러길 바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