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75주년 정상회의 참석을 마친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11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 인근 델레스 국제공항에서 공군 1호기에 탑승하기 위해 차량에서 내리고 있다. 2024.07.12. ⓒ뉴시스
일요일 아침 김건희 여사의 검찰 조사 소식을 접하며 잠이 덜 깼나 싶었다. 서울중앙지검이 밝힌 내용은 이렇다. “김 여사에 대한 출석을 요구했고, 협의 결과 경호와 안전상의 이유로 관할 내 정부 보안청사로 소환해 대면조사를 실시했다.”
지식이 짧아서인지 ‘정부 보안청사’라는 말은 처음이었다. 어떤 곳인지 느낌은 있었다. 문제는 왜 검찰이 이런 낯설고 뜨악한 단어를 꺼내 들었냐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라볼피아나’가 떠올랐다. 이임생 축구협회 기술총괄이사가 국가대표 감독으로 홍명보 감독을 선임한 이유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나온 용어다. 이미 홍명보 내정이 발표되자 축구팬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박주호 영상으로 협회와 정몽규 회장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총대를 메고 기자들 앞에 선 이임생 이사는 선임 과정을 설명하기보다 축구 전술 용어를 한껏 늘어놓았다. 라볼피아나는 수비형 미드필더와 포백을 변형적으로 운용해 전방 공격을 강화하는 전술이라고 한다. 당시 축구팬과 전문가들은 반응은 ‘갑자기 라볼피아나?’였다. 느닷없는 외국어 전술 용어 세례가 비판을 막으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도 나왔다. 마치 박주호에게 누가 던졌다는 ‘넌 지도자 경험이 없잖아’처럼.
서울중앙지검이 수사 장소로 공개한 곳은 ‘➀관할 ②정부 ➂보안청사’로 풀어볼 수 있다. ➀관할은 서울중앙지검 관할이다. 서울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지검이 있다. 종로구, 중구, 강남구 등이 중앙지검 관할이라는데 결정적 의미는 없다. 중앙지검은 이름처럼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수사력이 강한 곳으로 통한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중앙지검으로 오는 이유가 꼭 종로구, 강남·서초구에서 벌어져서는 아니다. 그러니 ‘관할’은 대략 ‘서울에 있는’ 정도의 뜻이다.
➂보안청사란 흔히 쓰이던 말인 안가(안전가옥)와 비슷한 시설로 보인다. 보안/청사와 안전/가옥은 단어구조도 비슷하다. 안전가옥은 단독주택 형태가 많은데 사무실 형태를 띨 수도 있을 것이다. 안가는 궁정동처럼 독재시절의 비리, 기밀, 접대 등이 떠오르는데 비해 보안청사는 공식적이고 깔끔해 보인다. 이런 시설은 청와대 근처에 많은데 대개 출입기록이나 주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처리할 비공식 업무나 만남에 이용된다. 과연 이번 조사가 이에 어울리는지는 의문이다.
②정부가 셋 중 가장 중요한 단어다. 건물의 소유주가 정부라는 것이다. 정부의 수장이 윤석열 대통령이고 조사받는 김건희 여사는 그의 부인이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검사가 정부 건물로 가서 조사한 것이다. 검사가 “언제 어느 안가로 나오세요”라고 할 순 없으니 김 여사 측에서 장소, 그리고 시간도 정했음은 확실하다. 이러니 출장서비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검찰이나 경찰이 방문조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입원이나 수감 등 불가피하게 출석이 어려운 경우가 그렇다. 포토라인을 피해 별도의 출입로를 이용하는 비공개 조사도 있고, 보안을 더 강화하고 싶다면 다른 청사나 검찰 시설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 경우는 검찰이 김 여사를 홈그라운드로 소환한 것이라는 명분은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김 여사 측에서 전날 장소를 정했다고 한다. 검사들은 서둘러 조사 준비를 하고, 당일 아침 양이 적지 않을 서류를 싸들고 지정된 장소로 향했을 것이다. 도착해서는 조사실은 어디고, 대기는 어디서 하고, 장소 사용상 주의사항은 무엇이고 등등을 건물주에게 안내를 받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 인원이 검사 일행의 신원 확인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핸드폰도 미리 제출해 조사 중에는 외부와의 연락도 끊겼다. 요즘 초중고 학생들도 폰을 내놓게 하지 못하는데 세상이다. 조사 사실이 알려지거나 여사 상태에 따라 중단될 수 있다는 말까지 듣고 시작한 조사이니, 누가 누구에게 조사를 받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한없이 굴욕적인 조사를 하고 와서 검찰이 한 일이 ‘관할 정부 보안청사’라는 멋진 단어가 포함된 공지를 일요일 아침에 뿌린 것이다. 어디서 라볼피아나의 향기가 나지 않는가.
축구팬들은 라볼피아나를 하나의 밈으로 만들었다. 클린스만 감독으로 시작해 홍명보 감독으로 끝난, 아니 브리핑을 한 이임생 이사로 끝난 환상적인 여정을 라볼피아나로 함축해 풍자하며 단단히 지켜보고 있다는 경고를 날렸다.
그런데 검사들은 어떤가. 세상이 다 아는데도 치욕을 잠시 감추려 정부 보안청사라는 생경한 말을 썼다. 그리곤 모른 척이다. 사표를 던져야 할 총장은 진상 파악을 지시하고, 이에 발끈한 검사는 사표를 던지겠다고 을러댄다. 영부인이 부르자 종로구 창성동으로 쪼르륵 달려간 자신들이 부끄럽다고 통탄한 검사가 있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다. 야당 대표가 언론을 직격하며 쓴 단어가 떠오른다.
덧)추경호 원내대표는 축구협회와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국민들에게 가장 걱정을 끼친다고 꼽았는데, 끝난 전당대회 대신 검찰의 김건희 수사가 들어갈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