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암살미수 사건이 미국 대선판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했다. 아직은 사건의 진상을 논하기엔 무척 이르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이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트럼프는 명실상부 ‘운명을 지배하는 남자man of destiny’로 등극했고, 그 결과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는 점이다. 그와 겨룰 상대로 오바마 등 미 민주당 상층 지도부가 막후 ‘쿠데타’로 바이든을 유폐하고 카멀라 해리스를 등판시키자 선거판이 다시금 출렁인다. 거의 비등한 여론조사 결과도 마치 주문이나 한 듯이 등장하자 ‘컨벤션 효과’에 불과하다는 등의 소리도 들린다. 일각에선 해리스를 일러 “치매 노인 바이든이 그럭저럭 일관성 있게 보이도록 만드는 지구상 유일한 정치적 존재”니, “암흑 속 범재성dark mediocrity의 여주인” 혹은 “불가해의 여왕”이니 여러 별칭이 붙기 시작한다. 트럼프를 상대하기에 민주당이라는 사실 외에 별로 내세울 게 없다는 말이다.
이런 사정은 자연스레 트럼프의 외교안보전략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현재 들리는 것만 놓고 본다면 트럼프2.0의 글로벌 안보 상황은 ‘급격한 방향 전환’ 혹은 급변침으로 실로 혁명적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트럼프 외교안보 이너써클이 돌려본다는 미국재생센터Center for Renewing America의 정책보고서Policy Brief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고서 제목은 ‘유럽에서 휴면나토Dormant NATO로의 기축변경Pivoting’이다. 2023년 2월 수만트라 마이트라라는 이 센터 연구원의 보고서다. 그 결론을 보자.
“… 미 정보기관의 보고는 북경이 모든 실질적인 목적을 위해 향후 수십 년간 모종의 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전략적 전역의 우선 순위조정이 그랜드 스트레티지의 핵심이며 반대급부를 지불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중국 위협을 상쇄할 2가지 논리적 경로가 있다. 첫째는 나토가 태평양을 감시하는 것 즉 유럽-대서양 축에서 아시아로 축선을 변경하는 것이고, 둘째는 미국이 일본, 호주와 같은 아시아동맹과 함께 중국의 부상에 대항한 균형 잡기에 집중하기 위해, 유럽은 상대적으로 자기 스스로 해결하는 방향에서 유럽으로 방위 부담을 이전burden shifting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간혹 독일 프리깃함이 홀로 인도태평양에 등장해 연대의 제스처를 보여주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원을 쪼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서유럽권은 동유럽권과 서로 다른 이해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끔 수사적인 연대사를 말하면서 무임승차free ride 하기 위해, 미국의 대유럽 안보공약을 이용해 이익을 누릴 것이다. 이보다 더 신중한 전략은 미국이 최후의 상황에서의 병참 제공자로서 미 해군력만을 제공하고, 유럽은 유럽인이 지키도록 강제하면서 미국은 아시아로 방향 전환하는 것이다. 서유럽은 불이 나면 엉클샘, 곧 미국이 나타나 유리 깨주는 일을 하는 한 자기 대륙의 방위에 진지해지지 않을 것이다. 반복된 경고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반대되는 결정을 하는 것은 정치적이지 실질적이고 구조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이 방위 부담을 유럽으로 이전하는 ‘휴면나토dormant NATO 전략’이 최우선 순위의 전략이 되어야만 한다.”
트럼프2.0의 그랜드 스트레티지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주적론’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는 기치 하에 ‘글로벌 나토’ 구상을 폐기하고, 유럽 방위는 유럽이 할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영토 할양 형태로 종결되고 나토 동진은 이미 충분하기 때문에 일단 멈춤 모드로 들어갈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철 지난 소리가 될 것이다. 여기에 ‘트럼프보다 더 트럼프스럽다는’ 러닝메이트 밴스의 말을 들어 보더라도 트럼프와 트럼프주의자 혹은 지지자들의 사고는 거의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첫째, 방금 말한바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다. 이는 유럽의 나토 동맹국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우크라이나 문제도 유럽의 문제이니 스스로 해결하라는 말이다. 이미 헝가리 총리 오르반이 EU 내 온갖 견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미국에 가서 트럼프를 만나 그 결과를 공유했다. 11월 5일 당선 확정과 동시에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결하겠다고 말했고, 이를 위해 오르반이 중개인으로 계속 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젤렌스키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본인이야 두둑이 챙겨둔 재산을 가지고 미국 등지로 도피하는 것도 괜찮은 옵션이다. 트럼프-밴스 팀으로선 견적이 나온다.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투자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좀 손해 보더라도 지금 ‘손절’하는 것이 차선이라는 말이다.
둘째, 서아시아는 전혀 다른 문제다. 특히 팔레스타인에겐 바이든이 최악이면 트럼프는 극악이다. 현재 이스라엘군은 하마스에게 이기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헤즈볼라와의 전쟁을 위해 가자에 하마스 잔존세력이 남더라도 전략적 주공 방향을 북부 레바논으로 옮기고 있다. 그리고 시리아에 대해서도 공격을 개시했다. 이후 ‘시오니스트’ 트럼프 정권이 이스라엘에 대대적인 군사적 지원을 개시할 경우 상황은 또 모른다. 마찬가지 이란과도 적대적 긴장은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트럼프1.0의 대서아시아전략은 초강경 친이스라엘이었다. 이 기조가 바뀔 것인가.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바로 직전 ‘북경선언’을 통해 파타와 하마스를 비롯 팔레스타인 14개 정파 모두로 이루어진 ‘민족대단결’ 합의를 중개한 중국이 본격적인 2국가 해법에 시동을 걸고 있다. 이란은 사실상의 군사적 동맹관계라고 할 러시아,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한층 고도화하고 있다. 달라진 조건에서 트럼프2.0이 과거의 친이스라엘 정책을 고수한다면, 이란은 물론이고 러시아, 중국과의 고강도 긴장도 불가피하다.
셋째, 트럼프는 최근 블룸버그지와의 장시간 인터뷰에서 대만이 미국 반도체산업을 100% 먹어갔으니 “방위비를 내라”고 말한다. 즉 동네양아치(?) ‘자릿세’ 받듯, 대만이 부자가 되었으니 돈으로 때우라는 말이다. 유럽과 관련해서도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되” 단 유럽의 돈으로 하라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미국 내에선 마치 침략을 날 받아 놓고 하기라도 할 것처럼 중국의 대만 ‘침략’을 언제는 2025년이라 하더니 이제 2027년으로 슬그머니 말을 바꾸고 있다. 대만이 독립선언하면 바로 전쟁이고 한국도 여기에 끌려 들어간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아직은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예의주시해야 할 대목이 있다. 표면상 트럼프는 비즈니스적 관점이 우세하다. 트럼프에게 전쟁이란 ‘다른 수단에 의한 비즈니스의 계속’일 뿐이다. 반면 미 의회 공화당이나 트럼프 주변의 트럼피스트의 중국주적론은 군사적 접근이 우세하다. 과거 트럼프1.0 시기에 볼턴이나 폼페이오와 같은 네오콘을 주변에 포진시켜 예컨대 북미합의가 파탄 났듯, 트럼프2.0은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얼핏 대척적이기도 한 접근을 어떻게 조율한 것인가. 지켜볼 지점이다.
바이든 정권의 지정치경제학은 한마디로 ‘동맹궁핍화’에 있다. 말은 동맹이지만 유럽, 일본, 한국, 대만 등 소위 동맹에 빨대 꽂고 빨아먹는 방식이다. 트럼프는 이보다 더 나갈 것으로 보인다. 대만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에 대해서도 방위비 ‘분담’sharing에서 방위비 ‘이전’shifting을 거쳐 방위비 ‘전담’을 운운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때 방위비는 단순히 대북용이 아니다. 트럼프팀의 중국주적론에 기반해,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겨냥한 방위전략에서 역할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북 방위는 한국이 스스로-단 한국의 돈으로-알아서 하고, 여기에 얹어서 반중국 전선에도 돈을 태우라는 뜻이다. 안 그러면 주한미군 뺀다는 식이 될지도 모른다.
제국은 이제 동맹궁핍화, 즉 소극적 빨대 꽂기에서 진화해 글로벌 지대추구형rent-seeking 패권전략으로 전화하지 않을까 싶다.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이 아주 잘 보여주듯, 미국의 금융자본주의는 이미 지대추구형, 즉 FIRE(금융, 보험, 부동산) 부문을 중심으로 불로소득 자본주의가 된 지 오래다. 이제 경제뿐만 아니라 안보에 있어서도 미국은 글로벌 ‘렌티어rentier’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삥이나 자릿세를 뜯어먹는 다소 귀여운(?) 양아치 단계에서 출발해 점차 고도화될 것이다. 최근 미 국방부가 한국의 방산을 미국과 통합하자는 식의 ‘담대한’ 구상을 말하는 것을 연상해 보면 되겠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나토 정상회담을 다녀와서 한미가 ‘핵동맹’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동맹에 따로 핵동맹이 있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윤석열은 지난번 한미일 삼각동맹을 성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 국빈 방문을 얻었고, 가서 덤으로 ‘기타 한 대 동전 한 닢’을 받아 왔다. ‘핵협의그룹’을 성과라고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팀은 이런 바이든 레거시에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인다. 한국이 안팎 곱사등이 신세가 되는 것이 다음 순서다.
트럼프의 새로운 그랜드 스트레티지, 구체적으로 전략적 순위재조정이라는 거대한 변화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 것인가. 아무래도 이것이 핵심이다.
첫째, 바이든 네오콘 정권의 ‘가치외교’를 맹목적으로 따라 베낀 윤정부의 가치외교는 파산을 맞게 될 것이다. ‘센 쪽에 무조건 줄서자’는 식의, 전략도 전술도 없는 안일하기 짝이 없는 숭미, 배중러 외교의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둘째, 트럼프 정부에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전 미 국방부 부차관보 엘드리지 콜비는 한국 핵무장까지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것이 될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 되면 핵확산방지NPT 체제가 붕괴되고 이는 곧바로 이란의 핵무장으로 이어진다. 한국 핵무장 주장의 논리적 전제가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다. 남핵론은 북한 비핵화론과 완전히 상충되므로 그리 되면 북한 비핵화론은 완전히 근거를 상실할 것으로 보인다.
셋째, 특히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조약이라는 전혀 새로운 한반도 안보환경이 조성됨에 따라 그리고 트럼프2.0의 전략적 요구에 따라 남북한 군사적 긴장관계는 ‘동결’될 수도 있다. 북러동맹과 한미동맹은 적어도 핵의 ‘공포의 균형’이란 점에서 일종의 빗장 상황이다. 하지만 평화공존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넷째, 유럽에 방위분담이 아니라 방위부담 이전을 요구하는 것에서 보듯, 한국에 방위부담이전도 강력히 요구할 것이고 이는 한국의 군비부담이 급격히 상승함을 의미한다. 대북방위는 스스로 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주한미군은 대북방위가 아니라 대중국견제가 주임무가 될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 얘기도 흘리겠지만, 지금의 평택, 군산, 제주도 등이 갖는 중국의 이른바 제1도련선 가장 깊은 곳의 비수로서의 지정학적 가치를 포기할 일은 없어 보인다. 동시에 한국은 대중국 포위 견제 나아가 억제를 위한 병참보급기지 역할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한국은 대북억제와 대중견제 사이에서 혹은 둘 다 즉 ‘이중적 딜레마’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바이든 때와는 달리 나토의 아시아 일원으로서가 아니라-남북한 군사적 긴장관계가 ‘동결’된다고 하더라도-미국이 새로이 지시하는 대중전략의 ‘졸’로서 충분히 역할해야 한다. 한국이 반중국 군사동맹인 오커스(미, 영, 호주) 앵글로색슨 동맹에 가입하고 장차 이를 나토와 연결한다는 바이든식 글로벌 나토전략이 설사 기각되더라도, 또 다른 형태로 반중 전선에 복무할 것을 미국이 요구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 후과는 외교적 집단자살에 비유할 만하다.
이 모든 것은 당연히 트럼프가 집권에 성공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유럽쪽 위기가 일시 휴면에 들어가더라도, 그 분쟁 파괴력이 서아시아 혹은 동아시아 방향으로 이전될지 모를 일이다. 윤정부로서도 매우 심각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정부와 한국 파워엘리트들의 세계 정세에 대한 가히 ‘범죄적’이라 할 무관심, 무지 그리고 태만의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진심, 우리의 ‘그랜드 스트레티지’가 없다면 헤쳐 가기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