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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내나는 삶]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피해자들의 눈물에서 하느님의 눈물을 본다

27일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희생자 시민추모제에서 유가족 및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2024.07.27. ⓒ뉴시스

“소수의 사치는 거대한 대중의 비참한 가난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가 이 가난한 얼굴들 속에서 감지해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도전하시는 그리스도의 고통스런 모습이다.”(1979년 3차 중남미주교회의, 푸에블라 문헌, 2장2항)

이 문헌이 발표되고 45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이로부터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도 소수의 사치스러운 사람들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로 또 이주노동자로서의 차별적인 삶을 강요하며 모독하고 있다. ‘위험의 외주화’와 ‘위험의 이주화’란 바로 소수의 사치스러운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모독하는 잔인함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사업주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안전장치를 위한 비용을 줄였기 때문에 그들은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다. 이런 사업주의 인색함과 잔인함 때문에 지난 6월 24일 경기도 화성, 아리셀 리튬 전지 공장 화재로 23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이 중대재해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더 지났지만 사용자는 유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고, 이 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밝혀야 하는 행정 당국은 너무도 무능하고 무책임하다. 그래서 7월 27일, 유가족들과 많은 시민들이 비인간적인 사업주와 무책임하고 반인륜적인 행정 당국을 규탄하며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리고 영정을 들고 폭우를 맞으며 서울역까지 행진했고 마지막으로 서울역 광장에서 추모문화제에 참석했다.

비인간적인 행위는 상대방도
비인간이 되게 한다
사업주는 경제적 부로
자신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싶었겠지만 타인의 고귀함을
무시한 것 자체가 비인간이고
그 비인간에게서 나오는 행위는
타인의 고귀함도 짓밟아
타인도 비인간이 되게 만들었다


비인간적인 행위는 상대방도 비인간이 되게 한다. 사업주는 경제적 부로 자신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싶었겠지만 타인의 고귀함을 무시한 것 자체가 비인간이고, 그 비인간에게서 나오는 행위는 타인의 고귀함도 짓밟아 타인도 비인간이 되게 만들었다. 지금도 화마 속에서 그리고 검은 연기 속에서 살고 싶어 발버둥 치며 외쳤던 피해자들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다.

사업주의 비인간적인 행위는 또 있다. 사고가 난 후 그들은 정식으로 사과를 하지 않았고 이 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하려고 우리 사회에서 최고라고 알려진 법률회사 ‘김앤장’에 그 변호를 맡겼다. 상식적으로 사고가 발생하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그들의 고통에 미안함을 표하는 것이 우선이다. 자신의 책임을 피하거나 줄이려는 몰상식한 행위로 말미암아 피해자들은 상실감을 공감 받지 못해서 더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사업주의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는 잔인 그 자체이다.

아리셀 참사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3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아리셀 교섭 회피 규탄 및 정부 대책 촉구 전국 동시다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정부의 근본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영정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4.07.23 ⓒ민중의소리

사업주의 비인간적인 행위 외에도 행정 당국과 공무원들이 보여준 행위 역시 비난을 받아야 한다. 화성 시청은 사고 발생 직후 애도를 표하는 현수막을 대대적으로 내 걸었지만, 이 사고를 빨리 마무리할 마음으로 영정 없는 분향소를 차렸고, 담당 공무원은 끊임없이 유가족들을 회유 협박하곤 했다. 그리고 유가족들이 분향소에 영정을 모셨을 때 유가족들에 대한 지원을 끊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관제데모를 하듯 분향소 철거를 요구했다고 한다. 나는 이들의 이 중대재해 참사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10.29 이태원 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과 너무 똑같고, 또 단식을 하는 4.16 희생자 유가족 앞에서 음식을 시켜 먹으며 조롱하는 반인륜적인 모습과 너무 같아 소름이 돋는다.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얼굴에
그리스도의 고통스런 모습이 있다
이들의 눈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눈물이다
연민의 하느님의 눈물은
이들을 고통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절규이다


또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가려내야 할 행정 당국은 마치 중립이 정도인 것처럼 일을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애도와 사고를 빨리 마무리 하려는 조급함은 사업주 쪽으로 편향된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고통 앞에서는 중립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와 행정 당국은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고 책임자를 가려내서 그 책임을 묻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참사 피해자들의 인격의 고귀함이 드러날 때 비로소 행정 당국의 관련 공무원들의 고귀함도 드러나게 된다.

27일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희생자 시민추모제에서 유가족 및 참석자들이 희생자 영정을 들고 있다. 2024.07.27. ⓒ뉴시스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얼굴에 그리스도의 고통스런 모습이 있다. 이들의 눈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눈물이다. 연민의 하느님의 눈물은 이들을 고통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절규이다. 지난 7월 27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의 기자회견, 폭우 속에서 진행된 행진과 서울역 추모제는 연민의 하느님의 연대이고 외침이다. 이 연민의 하느님의 연대와 외침은 행정 당국과 아리셀 사용자, 그리고 아리셀에 하청을 준 원청 사용자에게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올바로 예를 갖추고 참사를 올바로 조사하고 책임자를 가려내라는 엄중한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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