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컬 정미조는 특이한 존재다. 1972년 ‘개여울’로 데뷔해서 활동하는 동안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가수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전공으로 돌아가 미대 교수로 22년간 재직했다. 간간히 방송에 출연하며 존재만 확인해주던 그는 2016년 돌연 정규음반 [37년]을 발표하며 복귀했다. 그만큼 이름을 날렸던 김추자, 나미, 박인희 등의 복귀가 잠시 화제가 되고 말았던데 비하면 정미조는 네 장의 정규 음반을 계속 발표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음반이 호평 받는 현역 음악인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와 다르지 않은 가창력을 선보인데다 JNH 이주엽 대표와 손성제 등과 협업한 방식이 주효했다. 이들은 과거 정미조가 구사했던 팝의 흐름을 이어받으면서 정미조를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성인음악의 주역으로 탈바꿈시켰다. 1949년 생으로 2016년 복귀 당시 67세였음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결정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몇몇 중장년 음악인이 트로트로 전향한 사실과 비교하면 당연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정미조가 [37년], [젊은 날의 영혼],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에 이어 올해 7월 9일 [75] 음반을 내놓는 동안 우리는 ‘개여울’의 옛 정미조가 아니라 지금의 노래를 부르는 정미조를 만나고 있다. 나이 들어가며 그리워하고 후회하고 받아들이고 꿈꾸는 어른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수준 높은 성인 음악인을 한 명 더 곁에 두게 되었다. 비슷한 연배인 최백호와 비슷한 태도이며 조용필이나 장사익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정미조 - 75 ⓒJMH뮤직
이번 [75] 음반에서도 정미조는 손성제, 이주엽의 손을 잡고 음반을 만들었다. 12곡의 수록곡은 대부분 이주엽이 노랫말을 쓰고 손성제가 작곡했다. 손성제는 이번에도 프로듀서를 맡았다. 그렇다고 이번 음반이 함께 작업한 전작들과 동일하진 않다. 이번 음반은 몇 가지 차이가 있다. 먼저 손태진, 유채훈, 김민석, 존박, 이효리, 하림, 강승원이 함께 노래하면서 저마다의 기운과 색깔을 불어넣었다. 젊은 보컬리스트들은 분출하거나 폭발하는 대신 차분하고 담담하게 조력했으며, 중년 보컬리스트들은 삶의 깊이만큼 음영을 더했다. 여러 음악인들의 협업만큼 해사해진 음악은 ‘떠나요’나 ‘너의 눈망울’에서 경쾌한 리듬이나 새로운 사운드로 나아가며 정미조가 2024년의 음악인임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75] 음반은 인생에 대한 통찰이나 옛날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성인음악의 스테레오 타입에 갇히지 않았다. 그가 복귀한 전작에서는 이러한 서사로 감동을 주고 나이에 어울리는 캐릭터를 만들어냈지만, 이번 음반은 성인음악의 틀을 한정하지 않았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감각을 드러낸 ‘통영’, ‘떠나요’, ‘양양’ 같은 곡은 현재에 대한 기쁨으로 빛난다. 어쩌면 우리는 성인음악이라는 장르를 통해 성숙하고 자애로운 인간, 지난날을 돌아보고 가슴 저미는 인간이라는 뻔한 서사만 상상했는지 모른다. 그것이 성인의 이상적인 모습이거나 보편적인 태도라고 못 박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오늘은 새롭다. 날마다 심장은 뛰고 시선은 움직인다. 기쁨 또한 솟구친다. 정미조의 노래는 삶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균형을 맞추며 오롯하다.
정미조 '노라' Official MV
물론 이 같은 태도와 시선의 노랫말과 음악을 협업자들의 판단이라거나 레퍼토리를 확대하려는 전략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노랫말과 음악이 음악인 한 사람의 진정성만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한 판단 아닌가. 하지만 정미조가 노래할 때 느껴지는 우아한 수줍음은 음악에 필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평가하기 충분하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노래를 부른다고 보컬리스트에게 어떠한 진심도 없다고 볼 수 없으며, 역으로 모든 노래가 그의 사연이라고 볼 필요도 없다. 이 음반은 음악가가 딴따라였던 시절 노래를 시작해 한국대중음악의 역사를 함께 써온 한 음악가가 해오던 팝 음악을 계속 갈고 닦은 기록이다. 팝이 통속성에만 머물지 않고, 성찰과 공감으로 나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보컬리스트가 음악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연희자로서 한 곡의 음악을 자신의 원본으로 창조해낸 기록이다.
과시하지 않고 연민하지 않는 태도는 솔직하면서 섬세하다. 음반의 타이틀곡인 ‘노라’는 이 같은 태도가 만개한 곡이다. 싱어송라이터 이규호가 쓴 곡은 지나온 모든 청춘을 위로할 뿐 아니라 현재의 위태로운 청춘까지 껴안는다. 정미조의 절창이다. 그리움 가득한 노래 ‘엄마의 봄 (feat. 이효리)’에서 다시 울컥거리는 마음은 ‘살아있는가 (feat. 하림)’과 ‘세월 (feat. 강승원)’로 이어지면서 완전히 사로잡힌다. 허세가 없어 신파가 되지 않는 노래는 삶의 모호함과 잔인함을 받아들이며 정미조의 음악을 50년 전의 음악과 완전히 구별한다. 자신의 음악역사를 새롭게 써낸 놀라운 성취다.
[유튜브:AOH8woO1T0/설명:정미조x이효리 - 엄마의 봄 [더 시즌즈-이효리의 레드카펫] | KBS 240329 방송]
고독에 사로잡히지 않고 칭얼대지 않는 태도는 노랫말과 목소리 모두에 충분하다. 이 음반이 성인음악이 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미조의 나이가 많기 때문이거나 음악이 세련되고 우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하는 시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초조한 시대에 묵묵히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음반이 어떻게 성인음악이지 않을까. 요즘 노래가 노래냐고 푸념하는 어르신들 뿐 아니라 계속 나이 들어갈 모든 이들이 들으면 좋을 노래들. “나를 꿈꾸게 한 날들 이제는 그냥 놓아주리”, “새 아침이 다시 오겠지”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듣고 싶은 노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