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마을 만세] 누구나 꿈꾸는 마음속 광장을 ‘로컬 매거진’으로

해남에서 열한 살까지 자랐다. 마을의 중심에는 ‘똘뚝나무’라는 어린이 서너 명이 팔을 이어 감쌀만한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이곳에 모였다. 심심하고 시간이 많은 아이들은 약속을 정하지 않고도 똘뚝나무로 나가면 늘 함께 놀만한 누군가가 있었다. 우리는 나무 아래서 고누 놀이, 고무줄, 공기놀이를 하면서 해가 저물어 저녁밥 짓는 냄새가 날 때까지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동생을 포대기에 업고도 가볍게 고무줄놀이를 해내던 시절이었다. 밖에 나가면 늘 누군가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어떤 조합으로 만나도 즉석에서 이런저런 논의 끝에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냈다. 아래위로 서너 살쯤은 구분 하지 않았다. 나무 아래 와글와글 놀던 아이들은 언니인지 동생인지, 형인지 아우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만나면 늘 머리를 맞대고 지루하지 않을 무엇을 찾았고 늘 성공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놀이터, 누군가의 고민 상담소, 마을의 일을 논의하던 토론장, 명절이면 마을 사람들의 노래자랑 콩쿠르대회가 열리던 마을의 똘뚝나무는 광장이 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돌보고 키워냈다. 광장은 집의 연장선이며 서로를 연결시키는 공간이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길을 통해 갖가지 소식들은 모이기도 하고 분산되기도 한다. 우연한 만남을 통한 사람들의 조합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상하게 해주고 수천만의 경우의 수를 만들며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해남의 똘뚝나무와 스페인 몬드라곤의 광장 ⓒ필자 제공


유럽으로 여행하다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광장’을 만날 기회가 많다. 스페인 몬드라곤으로 협동조합 연수를 갔을 때 그곳에서 만난 마을의 광장은 지금이 21세기가 맞나 할 정도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차가 다니지 않는 좁은 골목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저녁을 먹고 모두 광장으로 나와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놀고 어른들은 와인 한잔 기울이며 하루의 이야기를 나눈다. 한쪽엔 공연장이 있고, 몇몇 아이들은 축구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스머프 마을의 사람 버전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였구나... 이곳에 산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상상을 저절로 하게 되었다. 아파트를 수직으로 오르내리며 어느덧 이웃과의 교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한국 사람에게는 꽤나 불편하기도 할 것 같고 중세 시대로 회귀한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7년 전 낯선 강원도 홍천으로 이사 와서 나는 여행자 또는 관찰자가 되어 새롭게 만난 이 지역을 흥미롭게 살펴보게 되었다. 낯선 도시에 갑자기 살게 되었다면 궁금해 할 평범한 고민들 - 홍천의 가장 큰 번화가는 어디인지?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은 어디인지? 어디에 가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지? 지역에 대한 정보들은 어디에 있는지? 도시의 모양과 구조는 어떤지. 지역민들은 어떤 일을 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을 알아보고 정리하며 를 연재했고 홍천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책으로 만들었다. 홍천지역 분들은 책을 읽으며 다 아는 곳들이 나와 너무 반갑고, 단숨에 읽었다고 다양한 반응을 보내주셨다. 하루는 사무실 앞에 매일 앉아 계시는 93세 할머니께 인터뷰를 청했는데 1920년대 태어나 왜정시대와 전쟁, 온 가족이 화전민으로 살았던 이야기를 얼마나 찬찬하고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던지 받아 적으면서 이 보물 같은 이야기들을 더 많이 기록해 놔야 할 텐데... 하는 사명감이 들기도 했다. 책이 나오고 2년 만에 할머니는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외손자가 찾아와서 할머니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남겨주셔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홍천에 살면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은 ‘도시의 구조’이다. 인도의 폭이 너무 좁거나 아예 없기도 해서 시내를 걸어 다니기가 어렵고, 쾌적하게 걸을 만한 녹지나 가로수, 광장 등이 전혀 설계되어 있지 않다. 땡볕의 울퉁불퉁 좁은 길, 또는 차도를 뒤에 오는 차 눈치를 보며 걷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한 이유로 걷다가 가게에 문득 들어가거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점점 적어진다. ‘차’를 포기하는 일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이미 고착된 길을 고쳐 보행로를 만들기도, 주차장을 줄이기도 몹시 어려워 보인다.

홍천군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실험적 공간으로 만든 목재정원. 공간의 구조는 사람을 담아내기도 하고 흘려보내기도 한다. ⓒ필자 제공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광장(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는 공간), 도시를 허물고 다시 지을 수 없다면 책을 통해 서로를 이어주는 광장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로컬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이해하게 하며 서로의 꿈을 나누는. 그런 매체가 이미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직 없다면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을 매거진 형태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매거진이라는 게 약속된 기간 안에 나와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지만 또 그 부담감 때문에 만들 수 있는 것이니 이제 시도해 볼 때가 되었다. (이것은 똘뚝나무가 나에게 가르쳐 준 일이다.)

그렇게 사업계획서부터 쓰기 시작해서 2023년 1년에 걸쳐 첫 홍천 로컬매거진 2023. vol. 1 ‘로컬은 가능성이다’가 만들어졌다. ‘관찰자’의 눈으로 수많은 지역의 가능성을 찾고 엮어서 보물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올해 2024년은 두 권의 로컬 매거진이 나올 계획이라 틈틈이 취재와 글쓰기 중이다. 가상의 공간, 광장과 같은 책이 돌아다니며 어딘가에서 우연한 만남과 반응을 일으키는 자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평범한 줄만 알았던 우리의 주인공들은 더 반짝이고 오늘도 삶은 흐른다. 

홍천상상 ⓒ필자 제공


박지선 로컬매거진 홍천상상 편집장

강원도 홍천으로 이주하여 귀촌한 여성들과 함께 예비사회적기업 ‘주식회사 상상너머’를 설립했다. 디자인, 홍보물 제작, 행사기획운영, 지역 아카이빙, 북스테이 운영, 농산물 판매 등 작고 소소한 생업을 다양하게 하고 있다. 한신대 사회혁신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빌바오, 몬드라곤, 바르셀로나 도시 혁신을 말하다], [포틀랜드 로컬과 혁신이 만나는 도시] 공동저자로 참여했고 홍천 지역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신장대리 100인의 이야기], [홍천엄마의 그림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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