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9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회의를 통해 채택한 ‘사회신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노동자교육, 노동시간 축소 소득세와 상속세의 고율적 누진법 제정 최저임금법과 사회 보험법의 제정
민주노총 등 노동자단체의 집회에 등장할 것 같은 구호들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주장은 1932년 9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회의를 통해 채택한 ‘사회신조’에 등장하는 12개 조문 가운데 들어있는 내용이다.
지금 보아도 파격적인 1932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사회신조
사회신조에는 이밖에도 △인류의 권리와 기회 평균(機會 平均), △인류 및 민족의 무차별 대우(차별 없는 대우) △혼인 신성, 정조에 남녀동등 책임, △아동의 인격존중, 소년 노동의 금지 △여자의 교육 지위 향상 △공창 폐지, 금주 촉진 △생산 및 소비에 관한 협동조합의 설치 △용인(傭人) 피용인(被傭人)간에 협동조합 기관의 설치 △ 일요일 공휴법의 제정, 보건에 관한 입법과 시설을 요구하고 있다.
몇몇 주장은 지금은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주장이지만, 1932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정조와 관련해 여성에게만이 아닌 남녀 모두에게 책임을 묻고, 차별 대우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은 너무나 파격적이다. 심지어 소득세와 상속세의 세율을 높이고, 최저임금법을 제정하고, 노동시간을 축소하는 등의 주장은 지금도 수구·보수 정치권이나 기업들을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면 오늘의 기준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개혁적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주장 자체가 파격적이다 보니 혹자는 ‘사회신조’를 발표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이른바 진보적 성향의 개신교 연합단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예수교 연합공의회’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4년 우리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여러 교단이 모여 만든 단체로 우리나라 유일의 개신교 연합단체였다. 출범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조선예수교연합장로회(장로교), 조선미감리회·조선남감리회(감리교),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파견한 선교단체에선 미국북장로회·미국남장로회·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캐나다연합교회(장로교), 미감리회·남감리회(감리교), 기독교기관으로는 대영성서공회·조선기독교청년회 등이 참여했다.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새문안교회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로 출발하였다. NCCK가 보유하고 있는 초기 자료 중에 아쉽게도 창립한 1924년 제1회 회의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당 사진은 출범 이듬해인 1925년 제2회 총회 회의록 표지 사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이후 1946년 조선기독교연합회와 1949년 한국기독교연합회를 거쳐 1970년부터 지금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이른바 보수신학을 대표하는 개신교연합 기관들이 1980년대 이후 생기면서 연합기관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00년 동안 한국개신교를 대표하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연합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회신조’는 1930년대 한국교회가 공산주의 사상의 성장에 맞서 발표한 일종의 ‘반공선언’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전신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왜 이런 내용의 사회신조를 발표하게 되었을까? 사실 현재 한국개신교의 많은 교회들은 사회적 메시지를 내는 것을 꺼리고 있다. 사회적 메시지를 내지 않은 채 상당수 교회들은 경제적 성공을 하나님의 은사로 포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러다 보니 친기업, 또는 친자본가적인 메시지가 많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독재정권 시절엔 임금을 올려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나, 노동조합을 만들어 권리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공산주의’이고, 자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는 행위라며 이를 탄합하는 독재정권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이런 일부 한국개신교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신조에 등장하는 여러 내용들은 ‘공산주의’ 또는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는 주장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신조’는 1930년대 한국교회가 공산주의 사상의 성장에 맞서 발표한 일종의 ‘반공선언’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사회신조’ 서문은 ‘우리는 하나님을 부(父)로 인류를 형제로 신(信)하며 기독(예수)을 통하야 계시된 하나님의 애(愛)와 정의와 평화가 사회의 기초적 이상으로 사(思)하는 동시에 일체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하고 진하야 기독교 전도와 교육급 사회사업을 확장하야 기독속죄의 은사를 받고 갱생된 인격자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사회조직체 중에 기독정신이 활약케 하고 모든 재산은 신께로 받은 수탁물로 알아 신과 인을 위하야 공헌할 것으로 신하는 자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방직 여성 노동자 ⓒ서울시
당시 세계적인 대공황과 식민지 수탈로 인하여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공산주의 사상과 관련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개신교 교회의 청년이나 신자들 가운데서도 유물론과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며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늘어났고, 이에 대한 대응의 의미도 담겨 있던 선언이 바로 ‘사회신조’다. 다만 당시 한국개신교는 공산주의를 배격하자며 맹목적인 반공운동에 나선 게 아니라 개신교가 노동자, 농민, 여성 등 소외받는 이들의 권리를 신장하는 운동에 오히려 앞장서자는 선언을 한 것이다. 실제로 △절대평등의 권리 △여자를 모든 압박에서 해탈할 것 △소득세 및 상속세를 누진율로 할 것 등 1926년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가 발표한 ‘조선공산당 선언’의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회신조와 닮아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밝히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려고 목소리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싸우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구원’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에게 있어서 환각적 행복인 종교를 버리라는 것은, 곧 현실의 행복을 지향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종교가 가난한 이들의 사회 변혁과 혁명의 의지를 꺾고 현실을 잊도록 위안을 전하는 일종의 마약과 같다는 지적이었다. 노동자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죽은 다음에야 갈 수 있는 천국을 약속하며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던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사회적인 현실은 외면한 채 개인의 구원만을 강조해온 기독교에 던지는 경고이기도 했다.
이런 유물사상에 대응해 한국개신교가 밝힌 사회신조는 적극적 의미의 ‘사회구원론’이다. 개인의 구원을 넘어 사회를 구원하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밝히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려고 목소리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싸우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개신교의 정신은 시간이 지나며 많이 훼손됐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자 많은 개신교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하며 일제에 협력했다. 또 많은 교회들은 사회구원은 외면한 채 반공의 목소리만을 높이 외치며 독재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버렸다. 물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해 사회신조의 정신이 이어져 오고 있지만, 한국 개신교 전체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크다. 올 9월이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창립 100주년, 사회신조 발표 92주년을 맞는다. 사회구원의 기치를 세우고,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노동자와 농민, 여성, 아동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한국 개신교가 오늘의 우리 사회를 향해서도 다시 한번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