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올해 상반기에만 ‘마이너스 통장’에서 91조원 이상을 끌어다 썼다. 정부 재정 운용이 임시변통에 의존하는 모양새다. 세수 부족 탓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잇따른 감세 조치로 세금이 걷히지 않자 단기 대출이 만성화된 것이다. 왜곡된 재정 운용이 한계에 달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은 최근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천수답 재정 운영”이라며 “감세 기조를 유지한 채, 하반기에 경기가 나아져 세수가 더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감세를 통해 세수가 증가하는 낙수효과는 찬성론자들 사이에서도 그 효과가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짧은 시간에 효과를 내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대세를 이룬다”고 짚었다. 경기 개선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기대어 재정을 운용하는 정부가 마치 빗물에만 의존하는 천수답 같다는 일갈이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양부남 의원(더불어민주당)이 한국은행으로부터 제출받은 ‘대정부 일시대출 내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총 91조 6천억원을 일시차입했다. 역대 최대 규모다. 일시차입금 가운데 71조 7천억원을 갚아, 잔액은 19조 9천억원이다. 이자는 총 1,291억원으로, 이 역시 전에 없던 규모다.
한국은행 일시차입금은 정부 세입과 세출 간 시차에 따라 발생하는 일시적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활용하는 자금 조달 수단으로, 말하자면 정부의 ‘마이너스 통장’이다. 정부의 잦은 마통 이용은 그만큼 세수 부족이 만성화했다는 의미다.
정 소장은 “가장 핵심은 일시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며 “액수가 작지도 않다”고 짚었다. 그는 “예를 들어 100조원을 한 번 끌어 쓰고 갚았다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갚으면서 다시 빌리기를 반복하면 만성화된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일시차입의 누적액이 문제 되는 수준을 넘어, 차입금을 다 갚지 못한 채 추가 차입을 받으면서 평잔(평균잔액)이 항상 얼마간 유지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수 부족이 만성적일 땐 일시차입처럼 변칙적인 방법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일시차입은 물가 상승을 자극하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정 소장은 설명했다. 그는 “일시차입은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 푸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효과를 낸다”고 말했다. 이어 “물가 안정을 가장 큰 목적으로 하는 한국은행은 성장률 1%, 물가인상률 1%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면서 “일시차입 평잔이 20조원이면 명목 GDP(2023년 기준 2,401조원) 대비 1%에 육박하는 규모의 자금을 더 푼 셈”이라고 했다.
재정 운용의 투명성 측면에서도 문제 제기가 나온다. 정부는 한국은행으로부터의 일시차입 현황을 공개하지 않는다. 국가채무에 포함되지 않아, 정부 재정 상태를 왜곡하는 요인이 된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국고 부족 자금의 조달 현황에 관한 자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정 소장은 일시차입 통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1월 ‘2024년도 한국은행의 대정부 일시대출금 한도 및 대출조건안’을 의결하면서, ‘일시대출금 평잔이 재정증권 평잔을 상회하면 안 된다’는 부대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다만 정부가 재정증권 평잔을 늘리면 일시차입 제한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게 정 소장 지적이다. 그는 “한국은행은 난감한 처지겠으나,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마이너스 통장 규모에 대한 판단은 국회와 정부에서 해주면 될 것 같다”며 공을 떠넘겼다.
“세수 악화에 자금 융통 한계 온 듯…감세 조치 원상복구 해야”
세수 부족 현상이 만성적으로 나타날 때는 국고채권을 발행하는 게 정석이다. 장기 채권인 국고채권은 사회복지 정책 등 공공목적 수행을 목적으로 한다. 차선책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재정증권을 발행하는 것이다. 재정증권은 일시적 부족 자금의 조달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국고채권과 차이가 있으며, 만기가 1년 이내로 짧다.
대규모 일시차입은 감세에 따른 세수 부족이 심화하면서 정부의 자금 융통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을 나타낸다는 게 정 소장 진단이다.
“지금 정부는 세수 감소 부담을 어딘가에 떠넘겨야 하는 상황이다. 일시적이라면 몰라도 계속해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면 일시차입이 아니라 국채를 발행하거나 최소한 재정증권을 활용해야 한다. 정부는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위한 국채 발행은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가운데 재정증권을 넘어 일시차입으로 융통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 일시차입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일시차입으로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수준으로 세수 감소가 지속되면 결국 국가부채를 늘려야 할 텐데, 윤석열 정부 들어 국가부채가 가파르게 늘고 있다. 향후 3년간 이 추세가 이어지면 코로나 팬데믹이 있었던 문재인 정부 시기의 증가 규모를 넘어설 수 있다. 거의 한계치에 다다른 게 아닌가 싶다”
나라살림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2028년까지 감세 효과는 총 89조원에 달한다. 올해 국세감면액 전망치는 77조 1천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다. 국세감면율은 16.3%로, 법정한도를 웃돈다. 감세 혜택은 대기업에 집중된다.
“세액공제 등 비과세·감면액은 영구 감세와 별도다. 예를 들어 세제개편으로 법인세율을 25%에서 24%로 줄였다고 할 때, 비과세·감면은 추가로 적용된다. 영구 감세와 비과세·감면은 주요 3대 세목인 소득세와 법인세, 부가세에 집중된다. 소득세를 깎아주면 세금을 내는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된다. 소득세를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깎을 세금이 없다. 법인세도 마찬가지다. 투자·R&D 세액공제 모두 대기업에 갈 수밖에 없다. 부가세 인하 효과 일부가 중소기업과 영세 소상공인들에게 적용될 뿐이다. 재정 지출을 확대면 주로 복지 분야로 돈이 가지만, 감세를 하면 혜택이 부유층한테 간다.”
정 소장은 ‘재정발 경제위기’가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감세와 긴축 재정이 경기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명박 정부 때 금융위기가 오고 재정위기가 이어졌다. 당시 사상 초유의 국채 발행을 단행하고 재정 지출을 확대하는 한편, 감세 중단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증세를 통해 30조원 규모의 잉여금을 남겨둬 그나마 재정 여력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금융위기를 무시하고 감세와 긴축 재정을 고수했으면 정말 위기가 왔을 것이다. 당시 한국은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은 데에는 정부 대응도 한몫했다. 지금은 경제 위기가 없는데 재정 위기가 오고 있다. 경제 위기가 온 다음에 재정 위기가 오는 어쩔 수 없는 상황과는 다르다. 재정위기가 경제위기를 가져오는 측면이 있다. 정부가 적재적소에 재정을 투입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방기하고 있다.”
정 소장은 최우선 과제로 감세 조치 원상복구를 주문했다.
“감세를 되돌려야 한다. 정 감세하고 싶으면 세 수입이 증가할 때 해야 한다. 교과서적인 얘기다. 세 수입이 줄어드는데 감세를 하면 안 되지 않느냐. 세 수입이 증가할 때는 일정 수준 감세를 해도 재정에는 문제가 없다. 정부가 강조하는 재정 건전성이라고 하면 수입을 줄인 만큼 지출도 줄여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가 기본적으로 해야 되는 역할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더 이상 줄일 지출도 없다. 한국은 GDP 대비 재정 지출 규모가 OECD 최하위권이다. ”
“비과세·감면 대부분은 국회 동의를 거치지 않고 시행령 개정으로 이뤄진다. 정부의 의지로 되돌릴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나치게 이념화된 탓인지 마치 감세를 안 하면 좌파 정부인 것처럼 얘기한다. 감세를 되돌리고도 부족하면 국채 발행도 해야 한다. 아무리 재정 여건이 어려워도 반드시 투자해야 되는 분야에 재원을 투입해 중장기적으로 경제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개선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최근 발표된 ‘2024년 세법개정안’에는 대규모 감세 조치가 담겼다. 나라살림연구소는 향후 5년간 세수 감소 효과를 18조 4천억원으로 분석했다. 상속증여세 감액 규모만 18조 6천억원에 달한다. 정 소장 설명과 같이 ‘세금을 낼 사람만 혜택을 받는’ 부유층 감세의 전형이다.
정부는 세금을 깎는 것뿐 아니라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실기했다. 대표적인 게 올해 R&D 예산을 전년 동기 대비 13.9% 삭감한 것이다. 지난해 6월 윤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뒤 나타난 결과다. 정부는 내년도 R&D 예산을 지난해 수준으로 복원했다.
“정부가 강조하는 재정 건전화를 하려면 감세로 돈이 줄어든 만큼 나가는 돈을 줄여야 한다. 문제 되는 예산을 줄이는 것도 능력이다. R&D 중에도 문제 있는 사업을 추려 다른 R&D 사업에 투자했어야 하는데, R&D 예산 자체를 줄여버렸다. 한 번 파괴된 R&D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국가 생산성을 악화시키는 행태다. 게다가 전반적인 재정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됐다. 보수 진영에서도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온 국가운영에 대한 철학마저 없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재정 건전성을 위해 카르텔이라든가 문제 있는 분야를 도려낼 필요가 있다. 그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다. 건설 사업을 둘러싼 이해관계라든가 산업 구조 개편을 가로막는 장애물 등 여러 카르텔이 있다. 대통령이 다 범죄자로 매도하면서 얘기하는 카르텔이 아니라, 진짜 카르텔을 혁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