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남성들의 영웅담이 아닌 여성들의 서사로 그려낸 한국전쟁

한국전쟁 당시 전북 임실군 옥정호 인근 배소고지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 생존자 200여 명의 구술 기록을 토대로 창작된 작품 ‘배소고지 이야기; 기억의 연못’이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제41회 대한민국 연극제 대상, 연출상, 연기상, 최우수연기상의 4관왕 수상에 이어, 제8회 이집트 샬름엘셰이크 국제 청년 연극제 대상과 연기상 수상, 제12회 루마니아 바벨 페스티벌 초청작으로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공연은 국립극단의 ‘2024 기획초청 Pick크닉’의 두 번째 작품으로 공연되고 있다.

‘배소고지 이야기; 기억의 연못’은 남성들의 시선과 목소리가 중심인 ‘전쟁’이란 주제를 소외된 여성의 목소리로 복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작품이 전쟁의 상흔을 보여주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지점이 아닐까 싶다. 때문에 ‘배소고지 이야기; 기억의 연못’은 기존의 전쟁극들과 차별화된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여전히 생생한 그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전쟁 당시 실제 양민 학살 사건이 무대로

2016년 가을밤, 임실 옥정호 근처 한 매운탕 집에 나이 지긋한 두 할머니가 앉아 있다. 바로 매운탕집 사장 ‘순희’와 어린 시절 친구 ‘입분’이다. 내일은 입분의 금강혼식 날이다. 마을 어귀에는 이 금강혼식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도 걸려있다. 두 친구는 마루에 걸터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입분과 순희 앞에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백소녀’가 그 어린 시절 어여쁜 모습으로 찾아온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친구 백소녀의 질문 앞에 입분과 순희의 대화는 한국전쟁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간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세 여성의 굴곡진 삶은 조금씩 속살을 드러낸다. 이들은 해방과 전쟁, 다시 혼란의 시대를 관통하며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백소녀는 왜,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동네에서 가장 수다스러웠던 입분은 왜 오랜 시간 말을 잃게 되었는지, 결혼하여 아이도 있었던 순희가 왜 혼자서 매운탕 집 장사를 하며 살게 되었는지가 드러날수록 관객들은 아픈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다행인 것은 무대 위 여성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상처와 고통을 간직하고 살지만 과거의 기억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기에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준다.

공감하고 연대하는 여성들의 서사

전쟁을 여성들의 서사 중심으로 풀어갔다는 것은 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이다. 무대 위 여성들이 맞잡은 손은 나약하고 힘이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힘들이 자식을 살게 하고 가족을 살게 하고 마을을 살게 했다는 것은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다.

“내가 기다리는 거는 사람이 아니고 시간 같은 거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시간 같은 거”

무대 위 입분의 대사다. 그런 기적은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을 되찾는 것 말이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배소고지 이야기; 기억의 연못’은 대한민국연극제 최우수연기상을 코러스 전원이 공동 수상하며 ‘코러스 연극’의 정석으로 평가받았다. 세 명의 주인공과 코러스 앙상블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치열했던 시간들을 보여준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다시 방관자가 되며 살아야 했던 시대를 때론 몸으로, 때론 대사로, 때론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무대 위에 또 다른 무대는 간결하고 절제되어 있어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연극 ‘배소고지 이야기; 기억의 연못’은 9월 8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