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연금개혁 공론화 결과로 나온 '소득보장안(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50%)'보다 소득대체율을 대폭 후퇴시킨 연금개혁안을 발표했다. 이에 시민·노동단체들은 정부가 함께 내놓은 '자동조정장치'까지 도입되면 사실상 연급 급여를 현재보다 더 낮추는 '연금 삭감안'이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4일 보건복지부는 제3차 국민연금심의위원회를 열고 '연금개혁 추진계획'을 심의해 확정했다고 밝혔다. 연금개혁 추진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내는 돈(보험료율)과 받는 돈(소득대체율)을 조정하는 모수개혁에 대해 보험료율은 현행 9%에서 13%로, 소득대체율은 40%에서 42%로 조정하기로 했다. 인상 폭만 보면 보험료률은 44.4%가 인상되는 반면, 소득대체율은 5% 정도 인상되는 셈이다.
소득대체율은 지난 2007년 2차 연금개혁의 결과로 매년 0.5%p(포인트)씩 내려 2028년 40%까지 인하될 예정이었다. 이에 올해 소득대체율은 42%다. 정부의 모수개혁안은 사실상 올해 수준에서 소득대체율을 동결하겠다는 의미다.
지난 21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에서 진행한 공론화 결과로 나온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50%의 '소득보장안'과 비교하면 대폭 후퇴된 안이다. 21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두고 벌어진 여야 간 모수개혁 논의에서 나왔던 여당 입장보다도 후퇴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소득대체율 44~45%, 국민의힘은 43%를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공론화에서 확인된 국민의 결정을 외면했다"고 비판했다. 참여연대는 이날 성명을 내고 "정부는 공론화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은 소득대체율 42%를 개혁안이라며 제시했다"면서 "이번 정부 연금개혁안은 공론화위에서 확인된 국민의 의견을 철저히 외면하고,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이 아닌 국민연금의 재정만을 고려한 연금개악안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도 이날 성명문에서 공론과 결과를 언급하면서 "연금개혁에 있어 보장성과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라는 것이 국민들의 의견"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복지부는 노후소득보장을 연금개혁의 원칙으로 제시하면서도 보장성에 대한 고려는 그저 시늉 정도로 그쳤다"면서 "노동시민단체가 보험료율을 인상에 동의한 것은 소득대체율 50%로 노후 최저생계를 국민연금으로 보장받기 위한 것이지 단지 재정안정을 위해 보험료율 인상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전문가들은 현재도 낮은 수준으로 평가되는 급여를 동결한다면 고령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노인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주은선 경기대 교수는 "현재 소득대체율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지금의 저급여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라며 "고령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 노인빈곤을 예방하는 데 핵심 제도인 국민연금이 제기능을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노인문제 대응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조정장치 도입은 급여 삭감안" "세대별 차등 인상, 1살 차이로 보험금 2% 차이"
이번 연금개혁 계획방안에는 지난달 29일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했던 자동조정장치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자동조정장치는 인구학적·경제적·재정적 지표에 따라 연금급여 등을 자동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의 구상은 급여에 대한 물가 인상 반영 비율을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국민연금 지급액은 소비자 물가 변동률에 따라 인상되는 구조다. 여기에 정부는 기대 여명이나 가입자 수 증감 등과 연동하는 자동 장치를 도입해 물가 반영 비율을 떨어뜨리겠다는 것이다. 연금 급여는 가입자의 '수급 직전 3년간 평균소득월액'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만큼 물가를 반영하지 않으면 급여 수준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시민·노동단체와 전문가들은 현재 수준으로 동결된 소득대체율에 급여 인하 기능을 하는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한다면 사실상 급여를 삭감하겠다는 연금개혁안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국민연금이 연금으로서 기능하는 것은 실질가치를 보전하기 때문"이라며 "실질가치가 보전되지 않으면 연금으로서의 의미가 없어지고, 보장성을 후퇴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현재 국민연금 월 평균액은 60만원인데 이걸 또 깎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참여연대도 "정부는 OECD 38개국 중 24개국이 자동조정장치를 운영중이라고 밝혔으나 이들 국가는 핀란드(24.9%), 스웨덴(18.5%), 독일(18.6%) 등 보험료가 상당 정도로 높은 수준이거나 공적연금에 대한 국고지원이 상당 정도 규모에 도달한 경우"라고 반박했다.
자동조정장치가 물가 반영 비율을 낮추는 만큼 수급기간이 긴 고령층에 부담이 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주 교수는 "저급여를 유지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삭감"이라며 "정부 구상대로면 물가 연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급여 수준을 점진적으로 떨어뜨리는 건데, 고령노인의 빈곤 문제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보험료 인상 속도를 세대별로 차등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구체적으로 50대(75년생부터)는 매년 1%p(포인트), 40대(85년생부터)는 0.5%p, 30대(95년생부터)는 0.33%p, 20대(05년생부터)는 0.25%p씩 차등을 두고 인상할 계획이다. 이럴 경우 50대는 4년만에 보험료율 13%에 도달하고, 40대는 8년, 30대는 12년, 20대는 16년에 목표 보험료율이 된다.
이에 대해 시민·노동단체들은 세대 간 연대라는 국민연금 제도 취지를 흔드는 개악안이라고 지적했다. 참여연대는 "사회갈등을 부추기고 세대 간 갈라치기를 통해 분열만을 조장할 것"이라며 "세계 어느 나라도 보험료율 인상 속도를 세대별로 차등화하여 적용하는 곳은 없다"고 비판했다.
1살 차이로 최대 보험료가 2% 차이가 난다는 지적도 있다. 75년생과 76년생은 1년 차이로 50대와 40대로 나뉜다. 50대가 보험료율 13%에 도달하는 2028년이 되면 75년생은 보험료율 13%, 76년생은 보험료율 11%로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해 주 교수는 "1년 차이로 수년동안 보험료가 1% 이상 차이가 나는 게 타당한지, 제도가 합리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국민연금은 세대 간 연대에 기초한 건데 보험금을 10여년 동안 다르게 부과한다는 게 제도의 기반을 다지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보건부 관계자는 이날 브리핑에서 "세대 간에 1년 차 때문에 (보험료) 차이가 많이 난다는 지적도 있긴 하다"고 인정하면서 "출생연령, 출생연도에 따라 그렇게 연령 그룹 안에는 큰 차이를 두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20대는 16년에 걸쳐 (보험료율)13%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그 이후부터는 모든 세대가 같은 13%를 부담하게 된다"면서 "다시 말하면 세대별 보험료 인상 속도 차등화 제도는 이번 개혁의 국민적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마련한 제도"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