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수경의 삶과 문학] “그늘이 없는 세계”

조세희 ‘제3작품집’ 「침묵의 뿌리」

조세희 작가와 그의 '제3작품집' '침묵의 뿌리' ⓒ열화당, 기타

쓰고 싶은 것이 없고, 쓸 수 있는 것도 없었던 더운 여름 어느 날, 친구에게서 조세희 작가의 제3작품집 「침묵의 뿌리」를 빌렸다. 나에게는 없는 책이고 서점에도 없었다. 지금은 다른 세상이라 말하듯, 1985년에 출간된 그 책은 절판되었다.

책에서 여름의 나를 향한 말인 듯한 이야기를 발견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작가는 1980년 인구 몇 만의 읍에서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읍에 가 봐야지.’ 1980년에 부산에서 살았던 작가는 그 말을 혼자 되뇌이다가, 4년 3개월이 지난 1984년 7월에야 그 읍에 갔다. 그 읍에 가기 전에 소품 하나를 썼다. 제목은 「어린 왕자」이다.

쏟아져 나오는 말을 끝없이 이어 쓰던 ‘나(작가)’에게 더 이상 말이 찾아오지 않았다. 날씨는 계속 나빴고, 이상 기후였고, 그해 ‘글농사’는 끝장이 났다. 얼마 동안 집을 떠나있기도 했지만 지친 몸으로 떠돌다 돌아왔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날, 아프리카 사막에 추락했던 옛날 프랑스 비행사의 책 속 어린 왕자가 발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다가와 책상 모퉁이에 올라앉았다. 금빛 목도리를 두른 어린 왕자가 내게(작가에게) 말했다.

“내가 388호 별에서 만난 작가는 게을러 보였어. 그는 글을 쓰지 않았어. 그 별의 작가들은 오래전부터 열 개의 말을 써 왔어. 그런데 어떤 재난 때문이었는지 그 말이 줄어버렸던 거야. 내가 찾아갔을 때 그 별의 작가들이 쓸 수 있는 말은 다섯 개밖에 안 되었어.”

그러자 작가가 말한다. “얘야, 나는 바쁘다.” “남의 재난에 신경을 쓸 틈이 나에게는 없다.” “오늘 밤에 써서 내일 아침 일찍 잡지사에 갖다 주지 않으면 안 돼.” 그러자 어린 왕자가 책상에서 뛰어 내리며 말한다.

“아저씨가 그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소혹성 388호에 두고 온 작가나 생각할 거야. 지금쯤 그 작가가 쓸 수 있는 말은 네 개나 세 개로 줄어들었는지 몰라.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그 정도의 말로는 ‘우리는 정말 행복합니다’라는 글밖에 쓸 수 없을 거야. 그 별은 참 이상해. 재난이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별은 이 우주에 그 별밖에 없을 거야.”

네 개나 세 개의 말을 쓰는 소혹성 388호의 작가는 무서운 뿌리가 별을 구멍 내는 바오밥나무를 아름다운 장미나무라고 우기게 될지도 모른다.

사북탄좌 노동자들 ⓒ조세희 '침묵의 뿌리'


나(작가)는 잡지사에 줄 글에 ‘그늘이 없는 세계’라는 제목을 단 다음 철끈을 꺼내 묶었고, 왕자는 아주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어린 왕자는 작가의 친구가 있는 감옥을 방문한다. 왕자는 높은 채광창에 앉아 “안녕” 한다. 그날 작가의 친구는 외롭고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울지 마.” 어린 유령이 말했다. 작가의 두 아이는 꿈속에서 높은 담을 넘어 감옥에 있는 아빠의 친구를 찾아간다. “아저씨는 이 좁은 방에서 왜 울고 있었어?” 어린 유령이 감옥에 있는 작가의 친구에게 말한다. “외롭고 슬퍼서 울었어.” 감옥에 있는 친구가 말한다. 감옥에 있는 친구의 형은 큰 배가 실어온 석탄을 자동차에 옮겨 실어 주는 힘든 일을 한다. 친구의 형은 석탄 먼지를 뒤집어쓰고 옛날 흑인처럼 일한다. 친구의 형은 가슴에 푸른 멍이 들어 점점 쇠약해진다. 감옥에 있는 친구의 아버지도 아들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힌 일 때문에 가슴 아파하다가 가슴에 푸른 멍이 들어 '돌아갔다'. 어른이 죽는 것을 우리는 ‘돌아간다’고 말한다. 어린 왕자는 “아저씨의 아버지는 절대 없어지지 않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어진 것처럼 생각될 뿐이야.” 한다. “고맙다.” 감옥에 있는 친구는 그곳까지 찾아와 위로해 주어서 고맙다고,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하루에 마흔두 번 해가 지는 소혹성 389호에는 툭하면 "늑대다!" 라고 외치는 왕이 있다. 어린 왕자는 마흔두 번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왕이 마흔두 번 "늑대다!"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왕자는 그 왕을 ‘소혹성 389호에 재난을 끌어들이는 자’라고 불렀다. 왕이 ‘늑대다!’ 만 번 말하면 몇 안 되는 그 별의 신민은 정확히 만 번 믿지 않음으로써 거짓을 말하는 자가 치러야 할 벌 가운데서 제일 무서운 벌을 내렸다.

서기 2024년 소혹성 ○○○의 심야 배송 노동자는 오후 8:30분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10시간 30분, 주 6일을 일하다가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 -오전 5시 24분”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쓰러져 죽었다. 제련소 냉각탑 청소 작업을 하던 하청 노동자는 이물질에 맞아 숨졌고, 제련소 옥상에서 작업하던 노동자는 열사병으로 숨졌고, 탱크 모터 교체 작업을 하던 노동자는 비소 중독으로 숨졌고, 제지 공장 열아홉 살 청년은 홀로 설비 점검을 하다가 의식을 잃고 숨졌다. 사고 현장에는 유독 물질 황화가스가 검출되었고, 100여 명의 청년들이 근무했다.

8월 13일, 에어컨 설치를 하던 스물일곱 살 노동자가 폭염에 쓰러져 방치되어 죽었고, 리튬 배터리 공장에서 불이 나 8명 부상, 23명이 숨졌고, 비숙련 노동자 불법 투입, 대피 경로의 총체적 부실 등으로 회사 대표가 구속되었다. 8월 7일, 대우건설 공사 현장에서 이동하는 굴착기에 부딪쳐 하청 노동자가 사망했고, 지난 6월, 경북 청도군 댐 공사 건설 현장에서 50대, 20대 두 하청 노동자가 잠수 작업 중 사망했고, 지난 3월, 경기도 의왕시 공사 현장에서 노동자가 추락해 사망했고, 지난 2월 충북 음성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40대 하청 노동자가 추락해 사망했고, 지난 7월 울산 남구 공사 현장에서, 인천 서구 공사 현장에서······ 사망했다.

작가는 감옥 독방에 있는 친구의 형을 찾아가 사진을 찍었다. 친구의 형은 큰 배가 실어온 석탄을 자동차에 옮겨 실어 주는 일을 했다. 힘든 일이었다. 작가는 쇠로 된 기계와 보조 기구에 신경을 쓰며 사진을 찍었다. 작가는 친구의 형을 도와준 쇠기둥과 쇠도르레, 그리고 쇠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보관했다. 사진에 다른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지구라는 '소혹성'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가슴에 푸른 멍이 든 채 고생하는 친구의 형을 단 한 번 도와줘 본 적이 없다

“어떤 소혹성에서는 바오밥나무가 장미나무와 비슷하게 생겨서 손댈 생각을 못 해.” 어린 왕자가 작가의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찻길 이쪽에서 보고 있었단다. 길 저쪽에 장미밭이 있었어. 그런데, 꽃밭에 있는 것은 장미가 아니었어. 그것은 바오밥나무였어. 나는 찻길을 건너 뛰어가 바오밥나무를 뽑으려고 했어.” 감옥에 있는 친구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자칫 늦었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거야. 그것이 별 전체를 휩싸 버렸을지 몰라.” 어린 왕자가 말했다.

사북탄좌 사북광업소 새마을 사택 ⓒ조세희 '침묵의 뿌리'

1980년 강원도 정선군 사북, 인구 몇 만의 읍에서 항쟁이 있었다. 광부들과 탄광촌 사람들이 탄광 회사와 어용 노조에 저항했다. 70년대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작가는 4년 3개월 동안 ‘그 읍에 가 봐야지.’ 되뇌이다가 1984년과 1985년에 사진기를 들고 사북으로 갔다. 조세희 제3작품집 「침묵의 뿌리」 2부와 3부에 그때 찍었던 사진과 사북의 이야기가 있다. 그때 찍었던 사진에는 당시 ‘대도시의 중산층 시민들이 30년 전에 이미 손 흔들어 작별했다고 믿었던’ 풍경들이 있다. 세상이 변했다는 말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옳은 것은 아니었다.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나흘의 저항으로 탄광촌 사람 110명이 연행되었고, 끔찍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고, 스물여덟 명이 도합 84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고, 다시 탄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어려운 나라의 지도 계층이 언제나 숨기려고 하는 것은 다수의 국민이 처해 있는 가난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사진에는 그림자 하나 없다. 그들은 빛이 가득한 세계만 보여준다.”
- 「침묵의 뿌리」


어느덧 나도, 소혹성 ○○○ 지도 계층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림자 하나 없고 빛만으로 가득한 세계의 신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쓸 수 있는 말이 네 개나 세 개에서 아주 사라진 여름, 나에게도 없고 서점에도 없는 그 책이 소리 없이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그 정도의 말로는 ‘우리는 정말 행복합니다’라는 글밖에 쓸 수 없을 거야.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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