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에서 도입한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을 폐지하기로 한 윤석열 정부가 공시가격 산정방식을 시장 가격 변동분만 반영하는 방식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부자감세 지적이 나온다. 공시가격과 시세의 차이가 클수록 저가주택 보유자보다 고가 주택 보유자의 세금부담이 더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성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현재 국내 부동산 공시가격의 경우 주택 유형·가격대·지역별로 차이가 커 시장 변동률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국토교통부는 12일 ‘부동산 공시가격 산정체계 합리화 방안’을 발표했다. 핵심은 전년도 공시가격에 시장 변동률을 반영한 산정방식을 도입한다는 내용이다. 산정식은 ‘전년도 공시가격×(1+시장 변동률)’이다. 사실상 현재 현실화율인 69% 수준에서 추후 시장 가격 변동률만을 반영해 공시가격을 산출하겠다는 것이다.
내년에도 올해 수준의 공동주택 변동률(1.52%)이 유지된다고 가정하면, 15억원짜리 아파트(올해 공시가격 10억3,500만원·현실화율 69%)의 내년도 공시가는 2.52%(1+1.52%) 오른 10억6,100만원이 되는 식이다.
이 경우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 추진 과정에서 발생했던 공시가격의 실거래가 역전 현상이 최소화될 것이라는 게 정부 측 주장이다.
“정부 ‘공시가격 산정체계 합리화 방안’도 부자감세”
하지만 정부의 이번 합리화 방안은 부자감세 논란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공시가격은 정부가 조사·평가해 공시하는 부동산 가격으로, 종합부동산세·재산세 등 각종 세금 부과는 물론 건강보험료 산정, 기초연금·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 등 67개 분야의 판단 기준이 된다.
합리화 방안이 적용돼도 가격이 높은 집일수록 보유세 감소 폭이 더 크다는 분석이 나왔다. 신한은행 프리미어 패스파인더가 정부 합리화 방안에 따른 시세별 보유세 부담 변동을 살펴본 결과 15억원짜리 주택의 보유세는 0.2%p(현실화 계획시 6.1%→정부안 5.9%) 감소한 반면 시세 30억원 주택의 보유세는 5.3%p(12.8%→7.5%)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을 폐지해 실거래가와 공시가격의 격차를 방치하는 것 자체가 부자감세라고 짚었다. 고가주택일수록 시세와 공시가격의 차이가 큰 상황에서 공시가격현실화율 폐기는 결국 고가주택에 적용돼야 할 세율을 낮춰주는 것이란 지적이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상대적으로 고가주택의 현실화율이 낮아 세금 감면 혜택이 더 큰 현상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부자감세’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 시장 가격 변동분만으로 공시가격을 산정한다는 건 초고가 주택이나 고가의 아파트 등에 세제 혜택을 주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임재만 세종대학교 부동산학과 교수도 “공시가격을 현실화해 보유세 부담이 늘어나면 표를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세금을 깎아주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집 있는 사람, 땅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세금을 덜 내게 해주는 부자감세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정책 자체의 실현 가능성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는 시장 가격 변동분을 반영 공시가격을 산출한다는 계획이지만, 개별 부동산마다 시장 가격 변동률이 다를 수밖에 없어 실제 적용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최 소장은 “우리나라의 공시가격 체계는 개별성이 매우 높다. 단독주택이냐 공동주택이냐 토지냐에 따라 다르고, 시도별로도 굉장히 다르다. 시도별로만 다른 것도 아니라 시군구 읍면동에 따라서도 개별성이 굉장히 강하다”며 “정부의 합리화 방안을 적용하기 위해선 이런 기존 공시가격 문제 해결이 선행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임 교수는 “부동산마다 현실화율이 다르고 가격 변동이 다를 텐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장 변동률을 적용할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면서 “마치 평균치만 적용하면 다 될 것처럼 정책을 내놨다. 공시가격의 실제 산정 과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놓은 대책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라고 지적했다.
앞서 문재인 정부는 2020년 ‘공시가격이 시세와 괴리돼 있다’는 비판에 따라 공시가격을 최장 2035년까지 시세 대비 90%까지 끌어올리는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을 추진한 바 있다. 정책의 핵심은 공시가격의 시세 반영률을 해마다 단계적으로 높여간다는 데 있다. 아파트 등 공동주택은 2030년까지, 단독주택은 2035년까지 순차적으로 시세 반영률을 90%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였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세 부담 완화’를 앞세워 지난해부터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로드맵 도입 이전인 2020년 수준(공동주택 69.0%)으로 낮춰 적용했다.
이번 발표안이 당장 내년부터 시행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부 계획대로 공시가격 산정 방식을 바꾸려면 국회에서 법을 개정해야 한다. 관건은 야당의 동의를 얻어 법을 개정할 수 있느냐다. 부동산공시법을 개정해야 산정체계를 개편할 수 있는데,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총선 때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법제화’를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