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축제의 계절이다. 언제부턴가 마을축제는 각 지방자치단체의 당연한 행사 치레가 되었다.
축제의 기원까지 살펴보지 않더라도,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의미의 마을축제는 일종의 제례 형태였다. 마을을 지키는 당나무라든가 마을신을 모시는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그에 딸린 행사를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이러한 제례들은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뒤편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공동체는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을 갖기 마련인데 이 전통이 ‘종교’로 인식되는 순간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전통제례들은 몇몇 마을원로가 지키는 낡은 풍습으로 전락했다. 강릉시의 단오제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이 되면서 전통적 양식을 전면에 내세운 채 진행 중이다. 신령한 나무인 ‘신목(神木)’이 행렬의 맨 앞에 서고 이 신목을 잘라내기 전 지역원로들이 제사를 지낸다. 사람들이 쌀을 모아 제사를 지내며‘신주(神酒)’를 빚고 이 신주는 상품이 되어 축제장에서 판매한다. 이 정도 브랜드파워를 갖지 못하는 마을의 제례는 그저 하긴 해야 하는데 대놓고 떠들기 어려운 행사가 되었다. 현재의 마을축제는 전통적 마을공동체의 기원·기복풍습과 무관하게 진행된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골목과 마을의 양상과 유대관계는 달라져버렸다.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은 ‘가까운 사람’를 경계하고 구분짓게 만들었다. 접촉 자체가 감염의 우려가 되니 ‘만나도 될 사람’과 ‘굳이 만날 필요 없는 사람’을 분류하게 만들었다. 질병관리청에서 내보낸 지침에도 ‘자주 만나지 않는 사람과의 접촉을 삼가라’는 내용이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내 옆에 선 사람이 기침이라도 하면 멀찌감치 떨어져 서게 되는 것이 감염병 시대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나뿐 아니라 내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한 행위였다.
할 일 없이 모여서 시시콜콜 한담을 나누던 자리가 사라지면서 공동체에 대한 관념은 재편되었다. 팬데믹 이후에는 기대하던 만큼 경기회복은 되지 않고 침체가 이어졌다. 코로나 이전에 쉽게 모집되던 강좌와 모임도 위축되었다.
최근 마을축제의 예산은 기초단체나 광역단위의 중간지원조직, 또는 각 행정단위에서 설립한 지역의 문화재단 등에서 나온다. 마을공동체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공통의 의제를 축제로 전환하려는 정책적 변화로 본다.
마을축제는 마을 내에서 정확한 이슈나 의제가 없을 경우 마을주민들을 결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마을의 의제를 발굴하고 방법을 찾아가는 것보다 행정에서는 축제가 훨씬 더 편한 방법일 수도 있다.
축제를 준비하다보면 행사일 하루를 목표점으로 세워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하게 된다. 장기를 뽐낼 수 있는 소재를 가진 동아리들은 1년의 하루를 목표로 해서 훈련을 목적으로 한 모임을 거듭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상호교류가 일어나고 축제 때 무엇을 할 것인지 의논하며 자연스럽게 민주적 의사결정체계를 갖게 된다. 마을마다의 특수성과 공동체 리더의 성향에 따라 고유의 의사결정체계가 만들어진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 시작부터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각 구성원의 참여가 늘어나고 적극적일수록 민주적 의사결정체계는 강화되기 마련이다. 마을 축제를 준비하다보면 일은 나눠서 할 수밖에 없다. 참여자들은 자신도 모르던 특기를 발견할 수도 있고, 평소에 관심만 갖고 있던 분야에 더 집중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마을공동체가 강화될 뿐 아니라 개인도 함께 성장하는 모델이 된다.
모든 마을축제가 다 이렇게 모범적으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마을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참여의지가 약하거나 그중 소수의 인원만이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할 때 마을축제는 길을 잃게 된다.
몇 년 전 마을축제를 준비하는 한 대표자를 만났다. 그는 보통의 마을축제 준비팀들이 신청한 예산의 세 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가져온 기획안엔 가수 출연료가 대다수였고 임차료 등 장비임대료가 수천만 원에 달했다. 이것은 마을축제 기획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 말에 그는 반박하며 화를 냈다.
“마을에서도 가수도 부르고 주민들도 그런 고급공연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고급공연’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으나 출연료를 받아야 하는 직업으로서의 가수를 무대에 올리겠다는 의도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가수나 연예인의 출연은 기획의도에 따라 더러 필요하다. 이들은 관객을 움직이게 하고 숨어있는 열정을 꺼낼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 일종의 제사장이다. 그러나 이들이 마을축제에서 주민보다 더 부각되면 그건 출연자를 위한 독무대나 콘서트가 될 뿐, 마을이나 지역의 축제라고 보기 어렵다.
외부 가수들을 초청하겠다는 마을대표자는 마을에서 펼쳐내기 힘든 기술적이고 고기능적인 연예인을 초대해 분위기를 한껏 띄우겠다는 의도였겠으나 이 경우 주민은 그저 관객이 되고 만다. 이런 축제는 ‘마을축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마을축제는 주민자치의 꽃
마을축제의 참여도를 높이고 주민들이 자기 자부심을 획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려면 축제의 일정이 미리 정해져야 한다. 날을 잡아놓고 역순으로 준비할 것들을 함께 하나씩 마련해나갈 기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체로 정부집행예산에 기대고 있는 마을축제는 예산이 집행될지 여부를 먼저 확인해야 하고, 지급방식이 공개모집이라면 공개모집에서 선정이 될 것인지도 불투명하다. 연초에 예산을 결정해 지급한다고 해도 4~5월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마을축제는 가을에 집중된다. 봄에 준비해 가을에 여는 마을축제는 충분한 숙의과정을 갖지 못한다. 축제와 무관하게 뭔가를 계속 꾸미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일정이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는 공연팀을 구하기 위해 동네 태권도장을 비롯한 학원에 연락하거나 동 주민센터의 주민자치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동원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마을축제는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 된다. 일하는 사람 정해져 있고, 구경하는 사람 정해져 있는 것이다. 진정한 마을축제는 너나 할 것 없이 거들고 참여하며 간섭하고 주도권을 나누어야 한다. 예산을 기대하지 않고 우리 마을은 원래 매년 이런 걸 한다는 합의가 있으면 사실 행정의 집행일정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면 프로그램이 구태의연하지 않고 같은 내용이라도 그 디테일이 달라진다. 음악밴드가 공연을 하더라도 그 구성원이 우리 마을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주민들이 갖게 되는 자긍심은 달라진다.
우리도 “이런 걸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 마을축제의 진짜 의도다. 우리도 “이런 걸 볼 수 있다”는 것이 마을공동체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마을주민들을 계속해서 객체화하는 작업은 주민을 대상화하고, 주민들의 참여의지를 꺾어버린다. 한 번 관객이 된 사람에게 이제부터 주인이 되시라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코로나팬데믹 이전 지역의 한 공동체와 마을주민들이 모여 마을축제를 기획한 적 있다. 회의과정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도무지 방향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고 과정과 절차를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느라 역할분담부터 각 프로그램 내용의 명분까지 일일이 따지며 시작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마을공동체에 ‘마을축제’라는 화두를 던져줬을 때는 중구난방으로 다양한 의견이 쏟아진다. 각 구성원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겪어온 각종 마을행사의 콘텐츠를 꺼내놓는다. 바자회, 알뜰시장, 먹거리장터, 어린이 장기자랑 등 무엇이든 좋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난 뒤의 마을축제는 정말 재밌고 신나는 콘텐츠로 가득 채워졌다. 아무래도 이것은 진짜 마을축제가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뒤로 물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아마추어리즘, 즉 비전문가들이 펼쳐내는 매력적인 활동이 있다. 주민들은 주변에 계속 소문을 내서 참여자를 모았고 마을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민들은 대가 없이 마을에 나와 전을 부치고 떡볶이를 만들어 팔아 기금을 마련했다. 사물놀이 동아리가 시작을 알리고 간소한 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진행했다. 굳이 대단한 재주가 없어도 무관한 것이 마을축제이며, 능숙하지 않았을 때 재미를 더하는 게 마을축제라는 걸 실감했다.
그 이후의 마을축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사람들은 도덕과 신념도 돈으로 사고 싶어 해 온갖 표어가 붙은 상품을 만들어 팔지만, 자발적인 기금은 모이지 않는다. 돈이 없는 공동체는 개인의 갹출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행정기관에서 예산을 내려주길 기다린다. 정부의 의지에 따라 공동체 활성화의 성패가 갈리는 시절이 되었다. 민관 협치라는 미명이 공동체를 단단하게 붙잡아줄 수 있는가. 마을의 시급한 의제는 차치하고 잔치나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단체 채팅방에 이런저런 축제의 웹자보가 올라온다. 예산을 지급한 행정과 공공기관의 로고가 빠짐없이 붙어있다. 유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만든 천편일률적인 일러스트가 가미되었다. 작년부터는 즉석 이미지사진 부스 임차운영이 눈에 띄게 늘었다.
집에 오는 길에 공원에 모여 떠들고 노는 아이들을 본다. 나도 여기서 뭔가를 꾸며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만 한다. 예산 없이 사람들을 추동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제 그런 세상은 끝난 게 아닐지, 나조차도 발을 내밀지 못하고 주저하며 산다. 오늘 할 일, 내일 할 일, 이런 일들이 나를 정말 먹일 수는 있으나, 살리지는 못한다는 걸, 잘 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