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투자·주주환원 않고 쌓은 돈 ‘헐값 탈취’ 행위 범람…상법 개정해야”

김규식 변호사, 재투자·주주환원 확대 시 PBR 개선 시뮬레이션 소개…전제 조건으로 이사 전문성·주주 보호 제시

20일, 김규식 변호사(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이사)가 20일 서울 여의도에서 ‘밸류업 중간평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한거포 세미나에서 발제하는 모습. ⓒ민중의소리

기업 이익을 재투자나 주주환원에 활용하지 않고 쌓아뒀다가 총수일가가 편법을 통해 독식하는 행태가 한국 증시 밸류업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주주환원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인 이후 재투자 비중을 높이면 기업가치가 대폭 개선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제시된다. 선순환 구조 현실화를 위해 상법에 주주 보호 의무 규정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김규식 변호사(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이사)는 20일 서울 여의도에서 ‘밸류업 중간평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한거포 세미나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배경에 대해 “한국 기업은 우량하지만 주주환원을 안 하고 비영업용 자산 비중 높은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비영업용 자산은 영업활동에 사용되지 않는 자산으로, 필요 이상의 현금을 비롯해 미수금, 사용되지 않고 있는 기계설비자산, 부동산 등이 포함된다. 회사가 번 돈을 재투자나 주주환원에 활용하지 않고 쌓아두는 탓에 기업가치가 저평가되고 있다는 게 김 교수 진단이다.

김 교수는 가상의 기업으로 밸류업 조치를 시뮬레이션한 결과를 소개했다. 영업용 자산은 2조원, 비영업용 자산은 1조원, 부채는 2조원으로 잡았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25배다. 시가총액이 자산을 모두 처분한 가치의 4분의 1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순이익 중 현금으로 지급된 배당금 총액 비율(배당 성향)은 20%로 설정했다. 한국 기업의 특징을 반영했다.

배당 성향을 70%로 상향하고, 비영업용 자산의 30%를 정리해 부채를 상환하는 것만으로 PBR이 1.02배로 뛰는 것으로 나타났다. 배당을 늘리는 대신 자사주를 매입하면 PBR이 1.63배까지 올라갔다. 주가가 저평가된 상태에서 자사주를 매입하면 저평가된 만큼 순이익이 발생해, 배당보다 효과적인 밸류업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게 김 교수 의견이다.

김 교수는 순이익의 70%를 주주환원에 활용하면 투자 재원이 부족해진다는 주장에 대해 “오해”라고 설명했다. 순이익은 원재료, 인건비, 연구개발(R&D), 설비 투자 등 성장을 위한 모든 재원을 차감한 값이다. 당초 순이익에는 투자 비용이 포함되지 않아, 주주환원을 늘려도 투자 재원이 줄어들지 않는다. 통상 기업은 5년 단위로 성장 전략을 계획하고, 성장 전략하에 계산한 투자 재원을 반영해 순이익을 도출한다.

김 교수는 주주환원 확대를 위해 이사회가 고도의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장기 성장 전략을 짜고 그에 따라 필요한 비용을 뺀 순이익을 주주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TSMC처럼 이사회가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면서 “경영진이 중장기 성장 전략과 재무계획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퇴출 이유가 된다”고 지적했다. TSMC 이사 10명 가운데 7명이 사외이사다. 통신사, 반도체 장비 기업, 반도체 설계 기업, 로봇 제조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출신이 포진해 있다. 관료 출신이 주를 이루는 삼성전자와 대비된다.

주주환원과 부채 상환이 진척된 상황에서는 예기치 못한 대규모 투자 수요에도 적절하게 대응할 여건이 조성된다. 낮은 부채비율 하에 차입하거나, 높은 주가로 유상증자를 진행해 투자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20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코스피는 전 거래일(2580.80)보다 12.57포인트(0.49%) 상승한 2593.37에, 코스닥 지수는 전 거래일(739.51)보다 8.82포인트(1.19%) 오른 748.33에 거래를 종료했다. 2024.09.20. ⓒ뉴시스

주주 탈취 횡행…제일모직 대법원 판결로 거버넌스 30년 후퇴

다음 단계는 이른바 ‘혁신 경제를 통한 궁극의 밸류업’이다.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확대해 주가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 자본조달 능력이 개선된다. 시가총액이 올라가면 유상증자와 회사채 발행을 통해 더 많은 자본을 끌어올 수 있다.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자본조달 능력 개선 이후 순이익의 10%만 주주환원에 투입하고 나머지를 모두 재투자할 경우 PBR이 5.85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주환원 확대 단계를 거쳐 자본조달 능력이 개선되고 재투자 확대 단계에 도입하면서 점차 기업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최선의 주주환원은 재투자를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주주 입장에서 재투자는 미래로 주주 이익을 이연한다는 것”이라며 “이연한 주주 이익이 미래 성숙기에 환원된다는 걸 보장해야 한다”고 짚었다.

한국에서는 주주환원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주주 이익을 재투자하거나 환원하지 않고 계속 쌓아두는 탓에 주가가 계속 하락한다”며 “결국에는 토실토실하게 살찐 돼지를 주주로부터 탈취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 자본시장에서 횡행하는 주주 탈취 수단을 지적했다. 불공정한 합병 비율이 대표적이다. 총수일가 소유 회사의 기업가치는 부풀리고, 그룹 내 핵심 계열사의 기업가치는 저평가하는 방식이다. 지난 2015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분을 보유한 제일모직은 자산 규모가 삼성물산의 3분의 1에 불과했으나, 합병비율은 제일모직 1주에 삼성물산 3주 수준으로 산정됐다.

핵심 사업 부문을 물적 분할하고 상장하는 행태도 벌어졌다. LG화학은 2020년 배터리 사업 부문을 LG에너지솔루션이라는 회사로 분리한 뒤, 2022년 상장시켰다. 배터리 사업 성장을 보고 LG화학에 투자한 기존 주주는 정작 LG에너지솔루션 주식을 받지 못했다.

헐값 공개매수도 주주 탈취 수단으로 꼽힌다. 한화그룹 3세 김동관·김동원·김동선 삼형제는 최근 개인회사인 한화에너지를 통해 지주사격인 ㈜한화 주식을 사들였다. 지분 취득은 ㈜한화가 저평가된 와중에 공개 매수 형식으로 진행됐다.

김 교수는 이밖에 자사주 매입 후 소각하지 않고 장기간 보유하면서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악용하는 행태, 총수일가가 소유 주식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붙여 고가가 팔아넘기는 행태 등을 지적했다.

주주 탈취를 막고 회삿돈이 재투자와 주주환원에 적절히 활용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주주 보호 의무를 규정해야 한다는 게 김 교수 주장이다. 현행 상법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으로 회사만 규정하고 있을 뿐, 주주는 빠져있다. 이사회 의사결정으로 주주가 손해를 보더라도 제재한 법적 근거가 없는 상황이다.

한 건의 대법원 판례가 상법상 주주 보호 의무 규정을 무력화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건과 관련한 재판에서 대법원이 “일반 상장 기업은 이사회가 주주에 대해 충실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판결했다는 것이다. 합병 당시 삼성물산 주주였던 엘리엇과 일성신약은 삼성물산 이사회가 자사 주주에 불리한 합병을 승인한 건 충실 의무 위반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으나,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교수는 “부동산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주식회사인 리츠는 부동산투자회사법상 인가 과정에서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심사한다”면서 “일반 상장 회사에 대해선 충실 의무를 인정하지 않는 건 말도 안 되는 해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궁극적인 밸류업 혁신 성장을 위해서는 이사의 전문성과 함께 주주 보호 입법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면서 “주주환원과 기업 성장률이 동시에 개선되면서 주주가치가 폭발적으로 제고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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