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정부의 홈페이지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공식 역사에 따르면, 최초의 시온주의 정착민이 팔레스타인 땅에 도착했던 1882년에 그 땅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최초의 시온주의자들이 도착하기 이전에, 팔레스타인 땅은 몇 세기 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였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 서사는 팔레스타인인을 팔레스타인 역사와 지도에서 지우려고 하지만 이런 역사 왜곡은 전 세계의 역사학자들의 반박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최근에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이 유포한 신화를 조목조목 반박한 일란 파페의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틈새책방,2024)도 번역되었지만, 같은 주제로 우리에게 제일 먼저 알려진 책은 랄프 쇤만의 『잔인한 이스라엘』(미세기,2003)이다. 쇤만은 이 책에서 시온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스라엘 신화를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 번째 신화는 앞서 본, 팔레스타인은 “땅 없는 국민을 위한 사람 없는 땅”이라는 신화. 하지만 1947년 팔레스타인에는 13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1,000여 개에 이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마을이 있었다.
두 번째 신화는 이스라엘만이 중동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실현한 국가라는 신화. 하지만 이스라엘은 시오니즘을 따르는 사람에게만 권리가 주어지는 정착민 식민지 국가일 뿐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국가다. 이스라엘은 건국 직후 이스라엘 분할지 내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지만, 현재 이스라엘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190만여 명의 아랍계 이스라엘인(아랍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이동의 자유도 군 복무를 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군 복무 제한은 자연스럽게 시민의 권리를 축소시킨다!). 아랍계 이스라엘인은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체포되고 고문을 당한다. “인종과 종교라는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시민적 자유와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인권조차 법적으로 부정되고 있다.”(20쪽) 국제앰네스티는 2022년 2월 1일,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정책과 제도를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로 규정했다.
이 신화의 흥미로운 사례는, 이스라엘 정부가 매년 해변 도시 텔아비브에서는 열리는 게이 퍼레이드 축제를 후원하는 것이다. 게이 친화적인(gay-friendly) 정책이 자국을 ‘중동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 LGBT 같은 성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나라’로 선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가 『99% 페미니즘 선언』(움직씨,2020)에서 의문을 제기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게이 친화적인 정책은 동성애를 허용하지 않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우위와 무슬림을 무조건 반동과 동일시하기 위해 활용하는 핑크워싱(Pinkwashing)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실제로 네타냐후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맡고 있는 민족종교당의 지도자 베잘렐 스모트리히는 공공연히 동성애 혐오를 선동한다.
역사를 날조하고 현실을 왜곡해 만들어낸 이스라엘의 시오니즘 신화 그러나 시오니즘은 지극히 세속적인 상황의 산물일 뿐
세 번째 신화는 이스라엘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간주되는 안보에 관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와 평화롭게 지내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할 자세가 되어 있었으나, 증오를 먹고 사는 원시적인 아랍 사람들로부터 생존의 벼랑으로 몰리는 전쟁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갖고 있는 이유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한국의 우파ㆍ보수주의 인사들과 개신교 목사ㆍ신도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정부와 시온주의자들이 퍼뜨린 이런 허황한 신화를 하느님 말씀처럼 따르는 이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거론할 이일호는 『강소국 이스라엘과 땅의 전쟁』(삼성졍제연구소,2007)에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선포와 동시에 일어난 제1차 중동전쟁을 “이스라엘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 아니었다.”(17쪽)라고 감싼다. 하지만 지은이는 저런 기술(記述)을 하기 위해,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했던 1947년 11월 29일부터 건국 당일까지 시온주의 군대와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영토의 75%를 점령하고 75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았다는 사실을 누락했다. 일란 파페의 말처럼 “아랍 군대의 파병은 이스라엘 건국 선언에 대한 대응이 아니었다.”(139쪽)
이 신화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아랍 연합국에 침공당한 신생국 이스라엘에게 역경에 맞서 싸우는 고립된 국가라는 이미지를 안겨 주었지만, 사실 막 건국을 선포한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무력하지 않았다.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을 때, 영국의 군대와 경찰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 투쟁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던 시온주의자 무장대는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그 지역에서 가장 잘 훈련된 군대가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가 비호하고 있는 한, 이스라엘은 ‘소국’도 아랍 지역에 고립된 국가도 아니다.
네 번째 신화는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도덕적 계승자라는 후광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말살하던 때에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유대인을 학살에서 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대인 구출하려는 연합국의 시도를 방해했다. 시오니즘은 유대인의 옛 땅(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운다는 목표로 요약할 수 있는데, 유럽의 유대인들 중에 시온주의에 공감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만약 유럽의 유대인들이 구출되었다면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했을 것”(77쪽)이라고 여기고, 팔레스타인을 선택할 사람들에게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시온주의자들의 더욱 놀라운 발상은, 나치가 자신들의 대의를 이해할 것으로 생각하고 나치에 추파를 던지며 협력을 한 사실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이 목표였던 나치가 시온주의자를 도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상극이나 같아 보였던 나치와 시오니즘 사이에는 인종주의라는 “공통된 기반”(88쪽)이 있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는 시온주의라는 발상이 유대인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상식에 금을 낸다. “시온주의는 한 마디로 팔레스타인을 식민지화하여 그 자리에 유대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운동이었다.”(66쪽) 이러한 사상은 1860년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싹텄는데, 1870년대 말과 1880년대 초 러시아에서 특히 악랄했던 유대인 박해 물결과 드레퓌스 재판이 드러낸 프랑스와 독일 사회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대응이 테오도르 헤르츨의 시오니즘으로 나타났다. 시온주의는 어떠한 성서적 근거나 유대인 고유의 창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세속적인 상황의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