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지학의 세상다양] PC 취급주의 경보? 혁명 없는 혁명 아닌, “일상에서 시작하는 혁명”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이 만드는 납작한 사유방식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PC 운동", "PC 주의자"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르네 피스터의 [잘못된 단어: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문예출판사, 2024)는 '취급주의' 예측대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나는 15년 전 미국에서 공부하며 활동하던 때 다양성, 인권, 사회정의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Social Justice Warrior(SJW, 사회정의 전사)', 'Political Correctness Totalitarianism(PCT, 정치적 올바름 전체주의자)'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워리어(전사)"라고 하니, '앞장서서 싸우는 사람(투쟁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가?' 라고 여겼다. PC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정치적이든 뭐든 최소한 "올바른 말"이라고는 생각은 하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것은 멸칭(멸시를 목적으로 비꼬기 위한 호칭) 이었다.

어떤 사회든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대중 의식의 변화(아래서부터의 변화)와 법과 제도의 변화(위에서부터의 변화)가 함께 일어나야 한다. 한 정체성에서 사회적 특권(Social Privilege)을 가진 사람들(예를 들면 미국사회(백인중심사회)에서 백인)이 소위 "PC한 말"(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말)을 듣고 불쾌해하며 이에 반발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면(예를 들면 인종차별적 정책을 지지하는 트럼프를 당선시킨 것) 이는 차별과 억압에 대한 대중의 의식의 변화를 위한 설득의 과정에 있었을 부족한 점을 발견해야 한다. 첫째는 백인들이 인종차별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할 이유를 충분히 공감하고 함께 행동하게 하지 못한 것이다. 둘째는 자신이 사회적 특권을 가지고 있는 백인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자신이 사회적 억압(Social Oppression)을 당하고 있는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한다.

전국 646개 단체 회원들이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와 성평등 정책 강화를 위한 범시민사회 전국행동 발족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2.11.08 ⓒ민중의소리


대부분의 백래시(평등을 향한 움직임에 대한 저항과 반발)는 문제의 원인을 사회적 소수자를 지목하는 '소수자 탓하기' 방식을 사용하며 진짜 문제를 가린다. 미국에서도 백인 이성애자 남성 노동자 계급에서 인종차별적인 정책을 지지하며 트럼프를 당선시키는데 앞장선 것은,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의 실패(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의도대로 된 성공)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어려움을 마치 이주민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당선과 인종차별적인 정책은 백인 노동자 계급에 '속 시원함'만 안겨주었을 뿐 실제 이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난해진 근본 원인이 이주민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 억압도 마찬가지로, 남성이 살기 어려워진 세상을 '역차별'과 같은 개념을 동원해 '여성 탓하기'를 한다. 남성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구조가 남성을 착취함에도 이를 여성의 탓으로 돌리며 백래시를 일으킨다.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허약한 민주주의가 낳은 괴물은 소수자 탓이 아니며, PC의 문제도 아니다. 시민들에게 "진짜 문제(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데 필요한 교육을 (의도적으로)제공하지 않는 사회에서 '소수자 탓하기'라는 손쉬운 기만적인 방법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확장을 위해 사용하는 트럼프나 윤석열과 같은 류의 정치인이 당선될 수 있는 정치구조와 사회문화를 직시해야 한다.

상처받기 쉬운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바른말 쓰기 운동?

PC하다고 여겨지는 말을 듣고 자신의 기분 나쁨만 중요하고, 누군가의 생존투쟁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특권을 살펴야 한다. '소수 약자들의 마음을 상처받지 않게 방어하는데 치중'한다는 주장은, 이것이 마음을 살필 뿐 어떤 변화를 만들고 있냐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마음의 상처'로 축소한 이들의 주장은 소수자들이 생존하는 것이 투쟁인 매일매일이 위기인 현실(사회적 소수자들의 자살률은 너무나 높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오늘 오전 세상을 떠난 트랜스젠더 활동가의 소식을 들었다)을 축소하고 은폐한다. 또한 '말하기'의 변화가 누군가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 '의식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결국 혁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누군가는 기분 나빠 하며 침묵하고 끝나겠지만, 누군가는 변화의 주체로 초대받는 계기로 삼는다. 후자를 더 많이 만드는 구체적인 설득의 기술과 교육이 필요하다. 나 역시 다양성훈련을 통해 변화의 주체가 되길 초대받았다. 일상의 변화는 누군가가 오늘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들고, 이러한 아래서부터의 변화는 법과 제도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문화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누구도 배제/비하/차별하지 않는, '모두를 포함하는 언어(Inclusive Language)를 사용하는 말하기'는 혁명 없는 혁명 아닌, "일상에서부터 시작하는 혁명"인 셈이다.

노조 반대하는 '바른말' 하는 자본가는 깨어있는 동료인가?

"PC하게 말한다고 모두 '깨어 있는 시민'은 아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방식의 말하기가 얼마나 이분법적이며 위험할 수 있는지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말이 어떤 인증처럼 따라다녀서는 안 된다. 단 하나의 정체성만 가지고 스스로 깨어있는 시민이라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보정당 지지자, 노동조합 활동가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은 '깨어있는 시민'이라고 자부하지만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의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수도 있다. 또는 반대로 성평등 활동가이거나 장애인권 활동가지만 노동인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수도 있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사회적 특권으로 인해 자신 역시 차별적인 사회가 지속되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모든 억압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하며 깨어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인증'처럼(한순간 주어지는 배지처럼)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타이틀을 가져다 써서는 곤란하다.

"PC한 말하기를 하는 자본가가 노조를 반대한다면 그가 우리의 동료라고 할 수 있을까?"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PC한 말하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나, 해외에서는 성별과 인종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광고를 만들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광고를 만드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자본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계급(Social Class)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광고나 제품을 만든다고 해서 '동등한 동료 시민'이라고 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다른 사회적 계급(Class)을 가진 그룹의 사람들(노동자와 자본가)을 두고 '동등하냐' 혹은 '동료냐'라고 묻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들 역시 우리 사회를 평등한 사회로 함께 변혁시키는 동료이길 바란다.

그들 역시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가 있다. 거기에 자본가로서 책무가 더해진다. 그들의 위치에서 그들이 해야 하는 의무와 책무를 하는 것(해야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에서는 이마저도(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광고를 하는 것) 하지 않고 있다. 자본가라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노조를 원천 봉쇄하거나 탄압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성찰 없이 노동자에 대한 억압을 지속하는 행위다.

어느 누구도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의될 수 있는 납작한 존재는 없다. 인종, 민족, 종교,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이주배경, 가족의 형태, 경제력, 학벌, 외모 등에서 다양한 교차하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을 갖는다. 누구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깊이 생각해보며, 하나의 정체성에서만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을 넘어서 모든 억압에 저항하고 평등을 만들어 가는 변화의 주체로 초대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것이 다양성훈련이다. 미국사회에서도 다양성훈련이 공교육에 들어가 모든 구성원이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양성훈련이 시작된지 60여년이 지났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다양성훈련을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 다양성훈련은 여전히 특별한 경험이다. 직접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더라도 문화적으로 퍼져가는 중이다. 한국사회에서는 다양성훈련이 시작된 지 이제 10년 정도 됐다. 내가 시작했다. 그동안 어려움이 많았지만 잘 버텨왔고 여전히 어려움이 많다. 우리 사회는 미국 사회를 반면교사 삼아 다양성훈련과 다양성 운동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언어에는 힘이 있다. ⓒpixabay

효율과 비효율, 우월함과 열등함,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분

공존이 중요하다. 공존은 함께 사는 것(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더 나아가 모든 생명이)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다양성과 포함(Diversity and Inclusion, D&I)이다.

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공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효율과 비효율, 우월함과 열등함,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잣대를 만들어 분리시키고 격차를 만든다. 모두가 평등하게 공존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현재 상황을 유지하면서 "평등하고자하는 척"하는 말을 한다. 기득권자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아름다운 말"이 되기 위해서는 권력의 격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배려해 주세요',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세요', '나답게 살자'와 같은 표현으로 이야기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개인적인 차원의 차별이나 폭력은 사용하지 않지만 사회구조의 변화를 시도하지는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개성 있게 사는 삶은 어느 정도 격려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고민은 할 수 없게 만드는 게 좋다. 그래야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은 사회 속에 살고 장애인은 시설에 살면 공존하는 게 아니다. 남성들은 높은 직급에 있고 여성들은 낮은 직급에만 있으면 공존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상황이나 역할 혹은 능력이나 역량에 의해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만드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당연하지 않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다. 같은 곳에서 같이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공존이다.

남성이 여성을 배려해야 하는 게 아니다. 성차별과 성폭력이 왜 존재하는가? 가부장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에게 성별권력(젠더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권력이 남성에게는 사회적 특권(Social Privilege)을 부여하고 여성에게는 사회적 억압(Social Oppression)을 주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포용해야 하는 게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왜 존재하는가? 비장애중심사회에서 비장애인에게 주어지는 권력 때문이다. 그 권력이 비장애인에게는 사회적 특권을, 장애인에게는 사회적 억압을 주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포함(D&I) 운동은 그 권력과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특권과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다. 사회적 특권과 억압을 당연하게(또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만드는 구조, 문화, 제도, 체제에 질문하고 도전하고 흔들고 허무는 게 목적이다. 체제 전환이고 사회 변혁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구조가 만들어지고 유지되게 하는 권력에 대해서 정확히 말해야 한다. 그 권력의 구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여성을 배려하세요', '장애인을 포용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구조적인 변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포함인가? 포용인가?

누가 처음 그렇게 번역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한국 사회는 지금 Inclusion(포함)을 포용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포용은 '상대의 부족함을 전제로 그 또한 인정해주는'듯한 위계관계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즉 다수자가 소수자를 너그럽게 받아주는 듯한 개념이다. 이것은 Inclusion이라기보다는 관용(toleration)에 가깝다. Inclusion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모두가 포함되는 사회(Inclusive Society)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주체로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사회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진짜 모든 사람이어야 한다. 어린이, 청소년,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 정말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사회적 정체성과 상관없이 그저 한 사람으로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이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 누구도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배제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사회)에서 자신이 낸 목소리는 그 공동체(사회)가 의사결정을 할 때 반영되어야 한다. 모두가 포함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은 이런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다양성은 권력의 불균형(사회적 특권과 억압)이라는 관점으로 사회를 분석하는 관점이고 포함은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실천이다. 모두가 포함되는 사회가 공존 사회다. 이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말로는 '공존 사회를 만들자'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고 싶지 않다. "하는 척"만 한다. 그래서 권력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국가, 지자체, 기업에게 쓰는 표현을 보면 '다양성'이나 '공존'이라는 말은 쓰지만,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반억압운동을 하거나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등 실제로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용어)를 혼탁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포함 대신 포용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다.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도 권력의 격차 그 자체에는 도전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약자를 배려하자'고 하는 것이다.

'나답게 살자'는 말도 많이 하는데, 사회적 소수자들이 나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왜 여성들이 나답게 살지 못할까?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여성성'이라는 것(여성스러운 외모, 성격, 하는 일 등)은 여성들을 자유롭게 할까, 아니면 억압할까? 장애인들이 왜 나답게 살지 못할까? 시설에 갇혀 있으면 나답게 살 수가 있을까? 학교도 못 다니고 직장도 못 구하면 나답게 살 수 있을까? 성소수자는 왜 나답게 살지 못할까? 내가 누군지 말도 못하는데 나답게 살 수 있을까? 내 성별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을 말도 못 하는데 나답게 살 수가 있을까? 청소년들이 왜 나답게 살지 못할까?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볼 기회는 전혀 없고 오직 대학교 입시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로 여겨질 때 나답게 살 수 있을까?

다양성 ⓒpixabay

다양성은 PC 운동인가?

PC 운동을 비판(혹은 비난)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PC 운동은 반억압(anti-oppression) 운동으로서의 다양성과 포함(D&I) 운동과 전혀 다르다. 물론 다양성을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다양성을 반억압 운동으로서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는 일로 접근하지 않고/못하고 개인적인 노력 혹은 인성 문제 정도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양성 운동은 '개성있는 성공한 사람 만들기' 혹은 '착한 사람 만들기'가 아니다. 다양성 운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사회변혁의 과정이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은 매우 부적절하며 경계해야 한다.

반억압으로서의 다양성, 사회정의, 인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가 동등한 주체로 포함되는 사회(Inclusive Society), 누구나 있는 모습 그대로 환대받을 수 있는 공동체(Belongingness),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Safe Space, Safe Environment)과 같은 말들이다. 모두 구조, 문화, 제도, 체제에 대한 이야기다. '정치적 올바름'같은 표현을 쓰는 사람은 없다. 같은 표현이 아니다.

다양성과 포함(D&I) 활동가들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서려있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한다. 이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사회적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차별, 억압, 폭력을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구조, 문화, 제도, 체제를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불평등한 사회구조는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소수자들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자'는 뜻이 아니다. 혹여나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면, 전달하는 사람이 잘못 전달한 부분은 없는지 혹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잘못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두 가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만약 다양성운동을 사회구조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그 사람이 취하고 있는 운동에 대한 접근 방식이나 방향이 문제인 것(혹은 부족한 것)이지 다양성운동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 다양성은 사회구조와 권력에 대한 관점으로 모든 유형의 억압에 저항하고 사회구조적 평등을 만들어 가는 변화에 대한 실천이다.

반억압, 다양성 존중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 중에서 스스로 'PC 운동을 한다'고 표현하거나 자신을 'PC 주의자'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전혀 없음에도 다양성운동을 PC 운동으로 표현하고 깎아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PC가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말하며 'PC주의자들이 아무 말도 못 하게 한다', 'PC 운동이 지옥을 만든다'고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아무에게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 역시 다양성과 포함을 위해서 중요한 개념이다. 모든 사람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표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가가 국민(시민)들에게,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비청소년(성인)이 청소년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차별적이거나 비하적인 표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담겨있는 말들을 쓰지 않아야 할 이유는 그 말들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억압(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착취, 폭력 등)을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 구조, 제도, 문화, 체제를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사회 문화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억압들을 더 공고하게 만들 수도 있고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사회적 억압들을 해체시킬 수도 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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