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다. 뒤지고 털다 보면 누구나 작은 흠결쯤은 있게 마련이니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교차로에서 정지 신호로 바뀌었지만, 주행을 멈추지 못하고 통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언젠가 나도 모르게 악의를 품었던 일이 있었는지도 생각하게 됐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된 것은 연극 '트랩'을 보고 나와서였다. 괜히 움찔해지고 위축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나도?
하룻밤 놀이처럼 시작되는 이 연극은 우연히 시작된 모의재판에서 인간의 숨은 죄를 추적하는 블랙코미디다. 스위스 출신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921~1990)의 단편소설 사고(Die Panne)를 원작으로 하는 연극 '트랩'이 세종문화회관 S 시어터 무대에 올랐다. 제목 트랩(Trap)은 ‘덫’이란 뜻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기괴하고 기이한 모의재판이 죄짓고 살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도덕적 순결성을 건드릴지, 혹은 파멸을 부르는 덫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숨은 죄를 찾아내겠다는 이들이 펼치는 법정극
무대를 중심으로 관객석은 세 개의 면에 위치해 있다. 무대 가운데로 고풍스러운 탁자가 놓여 있다. 과장된 모습의 한 남자가 등장하고 1980년대 팝계의 신데렐라였던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 노래가 흥겹게 흘러나온다. 남자의 이름은 트랍스. 그는 섬유 회사 판매 총책임자로 출장길에 오른 길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한 시골 마을의 퇴직한 판사 집에서 하룻밤 머물게 된다.
집주인은 트랍스에게 저녁 식사와 자신의 친구들과 하는 놀이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물론 트랍스는 집주인의 이상한 제안을 정중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트랍스는 전직 검사 초른, 전직 변호사 쿰머, 전직 사형 집행관 필렛, 그리고 전직 판사였던 집주인과 함께 무슨 죄인지도 모르는 피고인이 되어 모의재판을 시작하게 된다. 무대를 놓고 세 면에 위치한 관객들은 이제 이 재판의 배심원이자 앞으로 벌어진 일의 목격자가 된다.
자신은 살면서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고 자신하는 트랍스와 죄를 찾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전직 검사, 트랍스에게 끊임없이 경고하는 전직 변호사, 이 모든 과정을 방관자처럼 지켜보는 전직 검사. 이들의 밀당은 어느새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트랍스는 평범한 회사원에서 승진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사건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부조리한 현실을 기괴한 이야기로 끌어낸 작가의 의도
트랍스는 전직 법조인들이 펼치는 논리와 언변의 덫 속에서 속수무책이 된다. 경찰서 가는 일이 평생 있을까 말까 하는 일반인이라면 없는 죄도 끌어다 내놓을 판이다. 트랍스는 자신의 죄를 만들어 가며 점점 그 죄에 동화된다. 전직 법조인들은 놀랍게도 이 놀이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 은퇴 후 삶이 무료했던 이들에게 이 모의재판은 충분히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 주는 놀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의재판이 누군가에겐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는 순간이 될 거라는 것을 그들은 알 수도, 알 생각도 없어 보인다.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말은 그렇게 되었다. 트랍스의 죽음 앞에, 전날 숙취가 가시지 않은 전직 법조인들은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죄를 증명했노라고. 무섭도록 잔인하고 무섭도록 무감각한 이들의 대사는 부조리한 현실을 기괴한 이야기로 끌어낸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게 한다.
잔혹한 동화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사도우미인 시모네가 중간중간 식사를 위해 내놓는 음식들은 보는 재미와 상상력을 자극한다. 트랍스 역에 배우 김명기의 깊이 있는 연기와 배우 남명렬, 손성호 배우의 존재감, 서울시극단 단원 강신구, 김신기, 이승우의 관록 있는 연기는 작품의 질을 증명한다. 연극 '트랩'을 10월 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 시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연극 '트랩'
공연 날짜 : 2024년 9월 27일(금)~10월 20일(일) 공연 장소 : 세종문화회관 S 시어터 공연 시간 : 평일 19시 30분/주말, 공휴일 15시/월요일 공연 없음 러닝 타임 : 90분 관람 연령 : 13세 이상(2011년생부터) 원작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단편소설 <사고>(Die Panne) 창작진 : 예술감독 고선웅/각색 변유정/재각색·연출 하수민/프로듀서 박지환/무대디자인 남경식/조명디자인 김영빈/의상디자인 EK/분장디자인 김종한/소품디자인 곽내영/음악감독 이호근 /음향디자인 박창순/무대감독 전새미 출연진 : 김명기, 남명렬, 강신구, 김신기, 손성호, 이승우 공연 예매 : 세종문화회관, 인터파크, 클립서비스, 예스24, 티켓링크, 멜론티켓 공연 문의 : 02-399-1000(단체 문의 02-399-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