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세상을 떠난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 ‘맑스주의와 형식’에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현대세계에서 우리는 문명세계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레코드 음악과 저질 음의 요소에 물들어 있어서 우리의 지각도 그 대상의 수준에 맞춰지고 결과적으로 작곡가의 작업기반인 듣는 능력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음 자체가 아니라 그 분위기를 들을 뿐이며, 또 분위기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상징적인 것으로 되었다.” 한다. “악곡은, 고객을 청각적으로 진정해주는 비행장이나 슈퍼마켓의 음악이 그렇듯 단지 심리적 자극이나 길들이기에 불과해졌다.”고까지 말한다.
이 책이 1971년에 나왔고 지금은 2024년이니 50년 전 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좌파 지식인의 일방적인 매도라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다. 그런데 그래도 될까? 하나씩 따져보자. 지금의 음악이 저질 음의 요소에 물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음악을 저질 음이라고 평가하면 불쾌할 텐데, 지금의 음악 가운데 저질스러운 음악은 전무할까? 음악은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이 있는 게 아니라, 잘 만든 음악과 잘 만드는데 실패한 음악이 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저속한 음악이나 천박한 음악은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욕설을 하는 음악, 외설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음악만의 문제가 아니다. 음악 속 대상을 존중하지 않는 음악, 누군가를 모욕하는 음악은 음악으로 존중하기 어렵다. 무성의하게 만든 음악도 마찬가지다. AI를 통해 만든 음악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 음악 생태계는 그 모든 결과물이 공존하는 장이지만 예술적 감식안과 문제의식까지 내다 버릴 필요는 없다.
또 하나, 지금 음악을 듣는 이들은 듣는 능력의 질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그 분위기를 들을 뿐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카세트 테이프, 바이닐, 라디오, 콘서트 등의 방식으로 음악을 듣던 시대와 지금은 확실히 다르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듣고, 시디나 바이닐로도 듣는데, 여전히 공연장을 찾는 이들이 많다. 사실 음악 청취에 대해서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다. 이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음악에만 집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음악팬들조차 음악을 들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강의를 할 때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음악을 듣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는데, 날마다 1시간 이상 꼼짝 않고 음악을 듣는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출퇴근하는 길에 음악을 듣고(34.8%), 다른 일을 하면서 음악을 듣는다(18.1%).
이렇게 음악을 듣는 시간과 방식은 음악을 느끼고 이해하는데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이동하면서 음악을 듣고, 일하면서 음악을 들을 때는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음악, 음압이 높은 음악을 선호하게 되지 않을까? 2000년대 이후의 한국 대중음악, 특히 케이팝의 음압이 높아진 현상은 이러한 수용방식이나 발표하는 음악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게 아닐까? 특정 음악인을 열렬히 좋아하는 음악팬은 그 음악인의 음악을 들을 때 온 정신을 기울여 듣는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특정 음악인의 팬인 사람은 소수다. 그들조차 매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음악을 들을 가능성은 낮다. 특히 요즘에는 플레이 리스트를 듣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분위기를 들을 뿐이라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이야기를 부정하기 어렵지 않을까.
게다가 음반의 길이도 짧아졌다. 여전히 10곡 이상의 창작곡을 담아 정규 음반을 발매하는 음악인이 많지만, 싱글 한 곡(싱글 앨범이 아니다. 그냥 싱글이다)이나 두 곡을 발표하거나, 세 네 다섯 곡을 묶어 EP를 내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 이런 일이 많아지다 보니 8곡 이상의 정규 음반은 듣기도 전에 길게 느껴진다. 어느새 우리는 한 시간 정도 긴 음반을 진득하게 듣는 집중력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요즘 한 음악인의 정규 음반을 첫 곡부터 끝 곡까지 다 듣는 경우는 팬일 경우일 뿐이다. 대부분은 좋아하는 곡이나 히트하는 곡 한 곡만 찾아 듣는다. 그러다보니 더더욱 음반의 중요성이 떨어졌다. 열혈 팬들은 좋아하는 음악인의 음반을 반드시 구하려고 애쓰지만 이들 역시 소수다.
곡의 길이도 마찬가지다. 지금 차트 1위인 데이식스의 ‘HAPPY’는 3분 9초, 에스파의 ‘Supernova’는 2분 58초,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는 3분 25초다. 다른 히트곡들도 마찬가지다. 3분 30초를 넘는 곡이 거의 없다. 최근에는 2분대 케이팝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원더걸스의 ‘Tell me’가 3분 36초, 소녀시대의 ‘Gee’가 3분 22초였고, 1990년대 최고 히트곡인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은 4분 17초였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3분 47초였던 사실을 감안하면 히트곡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같은 현상은 대중음악을 온라인으로 향유하면서 소셜미디어의 다른 콘텐츠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여러 소셜미디어의 숏폼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곡의 길이가 긴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길이가 길어야 좋은 곡이고, 짧은 곡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다른 콘텐츠와의 경쟁 때문에 길이를 줄이는 상황은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게 하거나 음악을 다양하고 개성 있게 만들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변화는 이유가 있지만, 그 모든 변화가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평론가가 우려한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지만 이러한 변화의 흐름과 과정과 결과에 대해 차근차근 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좋은 음악을 자유롭게 찾아들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말기로 하자.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세상이라는 걸 모르는 바보가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