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진 중인 의료급여 개편을 두고, 의료급여 수급자들인 취약계층의 의료비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의료급여는 저소득층의 의료비를 지원해 주는 제도로, 현행 정액제를 정률제로 개편하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 무상의료운동본부, 시민건강연구소 등은 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급여 정률제 개편을 철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달 25일 공개된 의료급여 제도 개편 방향에 따르면, 정부는 의료급여 수급자의 외래 이용 시 자기 부담금을 ‘정액제’를 ‘정률제’로 변경하기로 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의료급여를 활용하는 이들의 본인 부담률을 높이겠다는 취지에서다.
현재 의료급여는 정액제로 시행 중이다. 수급자는 비급여를 제외한 급여 항목 진료에 대해 진료를 받을 때마다 일정한 액수를 부담하는데, 의원의 경우 1천원, 종합병원의 경우 1500원, 대학병원과 같은 상급종합병원의 경우 2천원을 내는 식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를 정률제로 바꿔, 의원의 경우 진료비의 4%를, 종합병원의 경우 6%를, 상급종합병원의 경우 8%를 내도록 변경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의료급여를 필요 이상으로 활용하는 수급자만 부담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수급자의 현실을 모르는 얘기라는 게 이들 단체의 지적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질병에 취약해 병원을 더 자주 이용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지금도 병원비 부담으로 충분한 진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행정상 착오로 최근에야 의료급여 수급자가 된 홈리스야학 학생인 김종언 씨는 “의료급여를 받기 전에는 감기 때문에 병원 진료를 받아도 진료비로 1만원을 내고, 약값으로 4천원을 냈다. 그러면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힘들었을 정도”라며 “다시 의료비 부담이 커지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야 바로잡았는데 너무나 허무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 입장에서는 조금만 오르는 것일지 몰라도, 수급자들이 느끼는 건 다르다”라며 “병원비가 오르면, 병원에 가지 않고 참을 때가 많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 씨는 “저는 백내장 환자이기도 한데, 수술비와 검사비가 비싸 의료급여도 소용이 없었다. 수술을 받기 위해 재단에 지원금을 신청해야 했다”라며 “이는 의료급여 수급자도 여전히 돈을 끌어와야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의 의료급여도 절대 충분하지 않은데 이걸 줄인다는 것 자체가 사람을 더 죽이게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씨는 “최소한 의료급여는 건들이면 안 된다. 더 망치지 말고, 오히려 더 싸게 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부의 주장과 달리, 의료급여를 정률제로 전환할 경우 수급자들의 의료비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반박도 나온다. 실제 기초법공동행동에서 의료급여 수급자 16명의 의료비를 조사한 결과, 정률제 개편 시 평균 9만 3천여원, 최대 34만 7천여원의 의료비 부담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되면, 의료비 부담으로 치료를 포기하게 되는 취약계층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가정의학과 의원에서 근무 중인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정부는 환자들이 의료비가 너무 싸서 병원에 너무 자주 간다고 하는데, 지금도 의료비 부담 때문에 병원 문턱이 높은 게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얼마 안 되는 생계급여에서 기본적인 생활을 하고 나면, 의료비 남기기도 빠듯하기 때문”이라며 “게다가 건강보험 보장이 되지 않는 비급여도 너무 많아 병원에 갈지 말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정부 얘기와 달리 병원에 가야 할 만큼 아픈데도 경제적 이유로 의료 이용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다”고 지적했다.
전 국장은 “의료급여 환자 중에는 노인과 장애인의 비율이 높다. 당연히 몸이 더 많이 아프고 병원에 많이 가야 한다. 의료비를 많이 써야 되고, 또 쓸 수밖에 없다”며 “이런 사람들의 의료비를 아껴서 재정을 절감하겠다는 정부는 존재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날을 세웠다.
빈곤사회연대 정성철 사무국장도 “공동행동에서 조사했을 때 정률제 개편으로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다수 사람이 ‘의료 이용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수적인 의료행위의 경우엔 ‘식비를 줄이겠다’고 응답한 사람 역시 대부분이었다”라며 “의료비 증가뿐 아니라 의료비를 예측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병원 이용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의료보장 정책인지, 약자와의 동행인지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질책했다.
이들 단체는 정부의 개편안을 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원을 가지 말라는 의료급여 개악안”이라고 규정하며 즉각적인 철회를 요구했다.
이들은 “우리는 불필요한 의료 남용을 줄이는 데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의료급여 개악안의 목표는 오로지 비용 통제, 재정 절감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타당성이 없다”며 “오히려 수급자들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며 의료 접근성과 건강권을 침해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의료급여는 빈곤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질병으로 인한 빈곤화를 예방하기 위한 최후의 의료 안전망”이라며 “정부는 지금 당장 의료급여 취지를 훼손하는 개악안을 철회하고, 의료급여가 빈곤층의 건강권을 얼마나 잘 보장하고 있는지, 미충족 의료가 발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미충족 의료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