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가 11일 서울 강남구 쿠팡CLS 본사 앞에서 쿠팡의 사과와 재발방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
쿠팡 로켓배송 업무를 하다 숨진 고 정슬기 씨의 사망이 뒤늦게 ‘산업재해’로 인정된 가운데, 쿠팡의 진정한 사과와 재발방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는 11일 유가족과 함께 서울 강남구 쿠팡CLS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쿠팡은 유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진정성 있는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라”라고 촉구했다.
전날 근로복지공단은 정 씨의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공단은 정 씨가 고용노동부 과로사 고시 기준을 훨씬 넘어선 시간을 일한 점, 주 6일 고정 야간 근무를 수행한 점,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를 수행한 점, 배송 마감 시간으로 인한 정신적 긴장 상태로 업무상 부담이 가중됐을 것으로 판단되는 점 등을 사유로 적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원청인 쿠팡CLS 직원은 정 씨에게 여러 차례 배송 독촉 메시지를 보냈으며, 정 씨가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라는 답장을 보낸 사실이 공개돼 사회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공개한 정 씨와 쿠팡CLS 관리자의 메신저 대화 내용 ⓒ전국택배노동조합
그간 쿠팡CLS는 정 씨의 유가족에게 어떠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전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홍용준 쿠팡CLS 대표는 정 씨의 산재 인정 소식을 듣고 나서야 “쿠팡과 관련된 업무를 하다가 돌아가신 고인과 유가족께 진심으로 애도의 말씀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가 진심이라면 그에 따른 재발방지책도 나왔어야 했지만, 홍 대표는 이 자리에서도 제대로 된 제도 개선책을 약속하지 않았다. 심야 노동에 대한 규제 방안을 논의하는 사회적 논의 참여도, 노동자의 과로사 원인으로 지목되는 쿠팡만의 ‘클렌징 제도’ 폐지 요구도 모두 거부했다.
정슬기 씨의 아버지 정금석 씨는 “아들의 과로사를 인정하는 요양신청서 승인을 통보받았다. 그러나 아들의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상황이 참담하다”라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죄를 누가 받아야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정 씨는 “아들이 가족들의 곁을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저는 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쿠팡의 진정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쿠팡은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사망 노동자와 유족을 무시하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며 “이제라도 쿠팡은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 사람을 연료로 사용하는 로켓배송을 멈춰라.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클렌징을 그만둬라. 사회적 합의에 동참해 공정한 경쟁을 하라. 어두운 노동 현실을 악용하려 하지 말고, 진정으로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좋은 기업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라고 호소했다.
아울러 정 씨는 쿠팡에서 더 이상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지 않도록 국회도 제역할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재 정 씨를 비롯한 쿠팡 유가족 3명은 쿠팡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진행 중이다.
그는 “만약 국회마저도 쿠팡 앞에서 무기력하면 우리에게는 정말 희망이 없어진다. 이제라도 쿠팡 청문회를 열어서 쿠팡에서 일어나고 있는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해달라”며 “국회만이 마지막 보루이고, 마지막 소망임을 기억하고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길 간절히 호소한다”고 당부했다.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가 11일 서울 강남구 쿠팡CLS 본사 앞에서 쿠팡의 사과와 재발방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
택배과로사대책위는 쿠팡이 마련해야 할 구체적인 재발방지책을 제시했다.
대책위는 “쿠팡은 4년 전 물류센터에서 사망한 고 장덕준 님이 과로사로 산재 인정을 받았을 당시 잘못을 인정하는 듯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가족들과의 대화를 단절했고, 최근 민사소송 과정에서 국가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인정 판정조차 부인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여준 바 있다”며 “이러한 행태들, 그리고 쿠팡이 내놓은 소위 ‘개선안’들을 볼 때 우리는 쿠팡의 지금 행보가 그저 소나기를 피하고 미봉책으로 덮으려는 꼼수라는 의심을 덮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책위는 ▲의학적 검토에 기초한 새벽배송 제도의 전면 개선 ▲쿠팡CLS와 심야 노동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 ▲클렌징 제도의 완전 폐지 등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대책위는 “말로 하는 사과는 큰 의미가 없다”며 “쿠팡이 ‘우리 시스템의 문제로 고인이 돌아가셨다’고 인정하고, 제대로 된 개선책을 들고 해야 진정한 사과다. 쿠팡은 제대로 된 재발 방지 대책을 들고 유족들을 찾아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민주노총도 별도 논평을 내고 “쿠팡은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