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전단을 실은 무인기가 북으로 날아가고, 동해선 경의선 남북 연결 도로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요. 무서워요, 엄마. 진짜 전쟁이 나면 어떡하지? 집에 못 가면...... 지금 집에 갈까? 집에 가고 싶어요······”
학교에 간 아이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그것은 오래된 공포였다. 나도 어릴 때 아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 폭탄이 떨어져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누군가 옆에서 죽어 가는 상상. 학교에 간 사이 전쟁이 터질까 봐, 집으로 가는 길이 끊어질까 봐, 가족과 헤어져 혼자 남게 될까 봐, 온종일 무섭고 불안한 날도 있었다. 우리의 공포는 아이들에게 이어져, 어쩌면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이어져, 오래된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떡하죠? 무서워요, 엄마.”
불안한 반도의 가을날
우편함에 책 한 권이 꽂혀 있다. 산책을 나가던 발길을 돌려 책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곧바로 책상 앞으로 가서 흐린 구월의 시간 같은 표지를 본다. 잿빛 하늘과 모래언덕, 멈춰있는 구름, 빛바랜 의자 하나. 표지 안쪽에 ‘2024년 가을······’이라고 쓰인 작가의 친필 사인이 있다. 이 책은 ‘불행한 반도’의 누군가, 또 다른 누군가의 기다림, 긴 기다림 속으로 사라진 시간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는 다 읽을 수 있으리라.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김이정 작가의 장편소설 「유령의 시간」을 읽으며, 불안한 반도의 가을 하루를 보낸다.
날마다 사구에 올라
동이 트기 전 새벽 4시, ‘이섭’은 서해안 간척지 새우 양식장 둑길을 돌아, 잠든 사람을 깨우듯 쿵쿵 발소리를 내며 수문 옆 철교를 건너, 바람에 밀려온 모래알의 언덕, 바닷가 사구로 간다. 텅 빈 해안을 두리번거리며, 사구에 찍힌 발자국 속에서 낯선 발자국을 찾으며, 그는 무언가를 기다린다. 붉게 동이 터오는 하늘과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바다. 누군가 바다로의 잠행을 계획했다면 더없이 좋을 새벽이다.
매일 아침 허물어지는 모래 기둥처럼 바다에서 돌아오지만, 기다림을 포기하지는 못한다. 곱고 마음 착한 남쪽의 아내와 네 아이와 같이 살고 있는 충청도 해안 마을은 따사로운 모래언덕과 갯벌과 잔잔한 바다가 있는 평화로운 곳이지만, 무기를 든 군인들이 들어와 있고, 밤이면 군사용 서치라이트가 강력한 조도로 해변을 훑는 ‘불행한 반도’의 서쪽 끝, 해안 경계 지역이기도 하다. 누군가 밀물을 타고 은밀히 숨어들 수 있다는 말이었고, 기다림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증거였다. 오늘도 그는 하염없이 기다린다. 어느 날 홀연히 고무보트라도 타고 올지 모를 그들을.
긴 이야기의 끝에
날마다 사구에 올라 돌아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는 사내는 김이정의 아버지이고, 또 다른 누군가 일 것이고, 미래의 어떤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 쓰지 못한 자서전을 남기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열여섯 살 소녀 김이정은 언젠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반드시 쓰게 될 거라고 예감했고, 40년이 지난 2015년 가을에 소설 「유령의 시간」을 출간했다. 이 작품은 ‘절명의 위기’에 있던 그녀를 구했고, 큰 상을 받았고, 불운한 절판의 시간을 보낸 후 2024년 9월에 복간되었다.
지난 2005년 방북 당시 김이정 작가 모습(사진 좌측 하단 검은색 티셔츠) ⓒ최경자
상해와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던 숙부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안동, 그의 집안사람들. 숙부를 보며 사회주의자가 되고 좌익 활동을 하는 형제. 쫓기는 남편 대신 젖먹이 아기를 업고 잡혀가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아내. 더는 숨어 살 수 없어서, ‘책으로만 읽은 이론이 현실로 구현된 현장’에 한 번은 가봐야 할 것 같아서 금단의 선을 넘은 사람. 그러나 목숨을 걸고 다시 남으로 내려온 사람. 그를 찾아 북으로 떠난 아내와 아기와 두 아들과 형의 가족. 엇갈린 운명. 전쟁과 분단과 이별. 수류탄 폭발로 신혼의 정겨운 남편을 잃은 여인. 오지 못할 북의 가족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내와 남편을 잃은 여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 긴 이야기 끝에는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딸 김이정이 있고, 북에 있는 사람의 딸로 기록된 김이정이 있고, 호적을 바꿀 수 없어서 애타는 김이정과 그의 노모가 있다.
끊어진 길이 이어져
2005년 여름, 김이정은 평양에 도착했다. 그해 7월에 평양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가 열렸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는 소설가는 그 여름, 남과 북, 해외 작가가 참석하는 남북작가대회 남측 작가단의 일원으로 고려호텔 13층에 머물렀다. 호텔 맞은편 아파트에 아버지가 평생을 기다린 아들, 그녀의 이복 오빠 ‘지용(소설 속 이름)’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낯선 발자국을 찾아 날마다 바닷가 모래언덕을 헤매던 아버지의 딸은 매일 새벽 그들이 있는 쪽을 애타게 바라보았을 것이고, 아파트 베란다에 어른거리는 낯선 남자의 그림자를 향해 목 놓아 소리치며 평양을 떠나왔을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 당신들을 그리워했습니다. 단 한 순간도 당신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당신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오늘은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당신들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붉고 푸른 빛이 겹치는 시간
노을을 질 때까지 불안한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 웅크린 몸을 편다. 순간, 책상 위에 올려둔 커피잔이 쓰러지고 식은 커피가 흘러내린다. 순식간에 책이 젖는다. 입고 있던 옷자락을 끌어와 황급히 닦아보지만, ‘2024년 가을······ 김이정’이라고 쓰인 페이지에 푸른 잉크가 번진다. 잉크의 푸른 빛과 붉은 노을 빛이 겹쳐 드는 짧은 시간. 문득, 오래된 미래는 우리 앞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머지않은 반도의 가을날 끊어진 도로는 다시 이어질 것이고, 이어진 길에서 그리운 사람들이 만날 것이다. 전쟁의 공포는 사라지고, 아이들은 두려움 없이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 그것이 우리의 미래라고, 붉고 푸른 빛이 겹치는 짧은 시간, 그녀의 젖은 책을 말리며 나는 생각한다.
김이정 소설가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 소설집 「네 눈물을 믿지 마」, 장편소설 「물속의 사막」 「유령의 시간」 등 출간. 「유령의 시간>으로 제24회 대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