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참 특이하다. 처음엔 한 몸처럼 연결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음새가 하나하나 끊어진다. 처음엔 탯줄, 그 다음엔 모유 수유 종결 등 물리적으로 붙어 있던 것들이 끊어진다. 정서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사회가 커지면서 아이의 내면에는 사회적인 관계들이 더 크게 자리 잡는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은 시간이 흐를 수록 커다란 공백을 품은 채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아이와 부모가 과거부터 쌓아온 끈끈함과 추억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영화 '위대한 부재' 속 주인공 타카시는 아버지와 거대한 공백을 가진 인물이다. 아버지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도 있다. 도쿄에서 연극 배우로 일하고 있는 타카시는 어느 날 아버지 요지와 관련된 전화 한통을 받게 된다. 아버지가 인질극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거진 30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는 정신도 육체도 새하얗게 늙어버렸다. 무엇보다 치매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타카시는 병원 관계자들이 아버지에 대한 질문(아버지가 알레르기가 있는지, 얼마나 떨어져 지냈는지, 면회는 얼마나 올 수 있는지 등)을 던지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애써 초연한듯 혹은 시큰둥 해 보이기도 하다. 슬픔이나 안타까움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아픈 아버지에 관한 질문 앞에서 그의 얼굴색은 무채색에 가깝다. 아버지의 부재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관계자들이 아버지의 연명 치료에 대해 물었을 때 타카시는 가볍게 해치우는 식으로 대답할 자신은 없어 보인다. "그걸 꼭 지금 대답해야 하나요?" 타카시는 말한다. 어쩌면 타카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타카시는 30년이라는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그래서 타카시는 아버지가 살던 집을 찾아간다. 그 집에서 아버지는 재혼한 아내 나오미와 함께 살았다.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시간적 물리적 공백을, 나오미는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집은 아버지의 상태를 보여주듯 산만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쪽지와 메모들이 가득하다. 저기 놓여야 할 물건이 여기 놓여 있고, 여기 놓여야 할 물건이 저기 놓여 있다. 그런 복잡하고 어지러운 집 속에서 타카시는 아버지의 일기, 편지, 단서들을 읽으며 아버지의 삶을 추적한다.
기억을 따라갈 수록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다. 젊은 시절, 아버지가 나오미에게 가졌던 절절한 진심이 그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라는 수식어를 벗겨내고 조금씩 청년(혹은 인간) 토야마 요지(아버지 이름)를 만나게 된다. 인생에서 느낀 좌절감, 한 여자 만을 향한 일편단심. 그리고 종국엔 "한 여자를 평생 사랑하는 일이 이토록 영광스러운 일이군요"라고 말하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
또한, 그 추적의 행로 속에는 아버지와 자신의 과거도 놓여 있다. 그 희미한 기억은 물감이 물에 번지듯, 30년이라는 텅 빈 공백을 서서히 물들인다. 영화 초반에 "기억은 소금물이 된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소금물에 소금이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부자의 공백이 투명해 보인다고 해서 추억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닿을 수 없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리고 조금은 맞닿게 해준다. 시리게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들 속에서 생기 있고 한편으론 애잔했던 인간의 위대한 감정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