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교는 내년에 도입되는 AI(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 준비로 정신이 없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도 2주 전에는 고1 학생들 전원에게 ‘디벗’(Digital+벗)이라 불리는 태블릿PC를 나눠주었고, 지난주에는 내년도 1학년 교실에 설치될 전자칠판을 결정하기 위해 관련 업체들을 불러 제품 시연도 하고 교사들에게 선호도 조사를 했습니다. 이번 겨울 방학에는 AI 디지털 교과서 시스템 구비를 위해 전국의 모든 학교가 공사판이 될 것입니다.
지금 교육계는 AI 디지털 교과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교육부 국정감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다뤄졌습니다. 대한민국은 코로나19로 전 세계 학교들이 문을 걸어 잠글 때 온라인 동영상 수업으로 학습 결손을 돌파한 정보통신 교육 강국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다는데 왜 문제가 되고 있을까요?
단순히 종이 교과서를 디지털 교과서로 대치한다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종이로 된 교재에 줄을 긋고 풀이 과정을 쓰면서 공부하던 우리 세대와 달리 요즘 학생들은 태블릿PC에 저장된 교재를 꺼내 필기하고 저장하면서 공부하는 데 익숙합니다.
문제는 ‘디지털’ 교과서가 아니라 ‘AI’ 프로그램 교과서라는 점입니다. 교육부가 조직한 ‘교육혁명 선도 교사 양성 연수’에 참여한 교사들을 통해 드러난 AI 디지털 교과서의 모습은 AI가 내는 문제를 풀면 그 결과에 따라 AI가 다음 문제를 내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AI가 종합적 평가를 해주는 방식입니다. AI가 “학생은 이러저러한 것이 부족하니 뭘 더 공부하라”는 식으로 지침을 준다는 것이죠.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했을 때 가장 큰 변화는 대시보드(Dashboard)입니다. 대시보드란 필요한 데이터를 통합하여 시각화하는 화면입니다. 교사, 학생, 학부모는 각자의 대시보드를 통해 교사는 학생들의 수업 현황을 파악하고, 학생은 자신의 수준에 맞춰 학습 속도와 양을 조절하며, 학부모는 자녀의 학습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개별화 맞춤형 학습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500만 학생을 위한 500만 개의 교과서(?)
교육부는 왜 이런 시스템을 만들고자 할까요? 교육부는 ‘500만 학생을 위한 500만 개의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주장합니다. 기존의 종이 교과서는 모든 학습자가 같은 수준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지고 그 내용을 주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생 개개인의 특성에 따른 교육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육부의 주장에 솔깃한가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10년 전 미국에서 비슷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2013년 구글 출신 엔지니어 맥스 벤틸라는 첨단 기자재로 무장한 대안학교, ‘알트스쿨’(Altschool)을 설립했습니다.
알트스쿨은 나이에 따라 학년과 반을 나누는 게 아니라 학생 개인의 흥미와 특성에 따라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입니다. 학생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교육과정을 짜고 교사는 디지털 플랫폼에서 학생을 교육했습니다.
알트스쿨은 미국 교육계에서 큰 화제가 되어 2014년에 3,300만 달러, 2015년에는 1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도 투자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초창기 알트스쿨은 9개가 설립됐는데 머지않아 교육계의 신화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5년 만에 9개 중 5개는 폐교하고, 4개는 다른 학교에 흡수되었습니다. 테블릿PC를 사용해 오디오북을 들을 줄은 알지만 정작 글자를 읽지 못하는 학생, 맞춤법 검사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글을 고쳐주니까 기초 수준의 단어 스펠링도 틀리는 학생이 속출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분노한 학부모들이 일반 학교로 자녀를 전학시켰다고 합니다.
디지털 교과서에 대한 입장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디지털 교과서 활용에 앞장섰던 스웨덴은 올해부터 디지털 교과서를 폐기하고 종이 교과서로 돌아갔습니다. 학생들의 문해력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필기체 쓰기 수업을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필수과정으로 되살리기로 했습니다. 스웨덴과 달리 독일, 폴란드처럼 디지털 교육을 확대하고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유네스코(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는 작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디지털 기기를 통한 교육이 교사들이 지도하는 대면 교육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대다수 교사가 반대하는데도
AI가 학생을 지도해준다면 교사들은 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교사는 반대합니다.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실에서 지난 7월 초중고 교사 19,66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 73.6%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는 디지털 기기 중독 문제입니다. 작년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스마트폰 과의존’ 조사에 따르면 10세 이하 어린이는 25%, 10~19세 청소년은 40.1%가 스마트폰 중독 상태입니다. 지금도 디지털 기기 과잉 사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비책이 없는 상태에서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은 걱정될 수밖에 없지요.
둘째는 시범 실시를 통한 검증도 없이, 학교 현장에서 준비할 시간도 없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 때문입니다. 내년에는 초등학교 3·4학년, 중1, 고1부터, 수학·영어·정보 과목부터 시작해서 2028년에는 초3~고3 모든 학년에, 거의 모든 교과에 적용됩니다. 당장 4개월 후면 AI 디지털 교과서로 수업해야 하는데, 교과서 선정은 11월 29일에나 된다고 합니다. 교사 연수도 거의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달 보궐선거로 당선된 정근식 서울시교육감도 후보 시절부터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 유예를 주장했습니다.
많은 교육단체들이 교육부가 밀어붙이는 의도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올해 R&D 예산을 5조 원 가까이 삭감했고, 내년도 고등학교 무상교육 예산을 99.4% 삭감한 윤석열 정부가 AI 디지털 교과서만큼은 밀어붙이고 있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정치적 욕심입니다. 교육부는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 나라가 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실패로 끝난 부산 엑스포처럼 치적 홍보를 위해 추진하는 게 아닌가 의심합니다.
둘째는 에듀테크(Edutech)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결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전국의 학교에, 500만 학생에게 디지털 기기를 공급하고 학교 정보통신망을 구축하는 것은 수조 원이 필요합니다. 현재 교육부가 밝힌 예산은 매년 5천억 원씩 3년간 1조 5천억 원이며, 국회가 추산한 AI 시스템 운영에 필요한 구독료가 연간 2조 5천억 원입니다. 교사 연수 경비만 해도 3,800억 원이 듭니다. 엄청난 예산이 사회적 합의나 교육적 검증 없이 막무가내로 추진되는 것을 보면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을 떠올리게 됩니다.
교육은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말고’ 식으로 추진해서는 안 됩니다. 준비가 부족하면 일단 유보하고, 교육계가 요구하는 검증 기간을 거쳐 사회적 합의를 통해 시행해야 합니다.
특히 교사들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역대 정권의 교육개혁이 모두 실패한 이유는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교사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교육관료들의 상상력 속에 존재하는 교육개혁안을 밀어붙였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일단 AI 디지털 교과서 사업을 유보하고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교육계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