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랜 75』를 드디어 봤다. 고령층이 되니 이런 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다.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는데, 지역의 작은 영화관에서 무료로 상영된다는 소식에 달려갔다. 그 영화를 보러 가면서 오늘도 2~3명만이 영화를 보겠구나 싶었다. 작은 영화관은 항상 관객이 적었다. 특히 오전의 영화를 볼 관객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수가 많았다. 노인복지 관련 단체 실무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영사기에서 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한 무리의 노인들이 도착했다. 대부분 남성들이었다. 아마도 버스 서비스가 늦었나 보다. 어두운 상영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 자리를 찾는 모습이 빛을 받고 있는 스크린에 커다란 그림자로 비쳤다. 구부정한 그들의 모습이 영화의 시그널 같았다. 몇 분들이 영화 도중 일어나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분들은 왜 나갔을까?
『플랜 75』, 당신의 선택은?
초고령사회의 일본에서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발표하는데 그것이 ‘플랜 75’이다. 즉 안락사를 지원하는 것이다. 고령자의 수를 줄여서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물론 영화 속에서이다. 안락사, 조력사에 대하여 난 부정적이지 않다. 그런데 나를 포함하여 안락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안락사를 지원하는 플랜 75에 대해서 찬성할 수 있을까. 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플랜 75는 형식적으로 개별의 선택이긴 하나, 국가가 그것을 적극 지원하여 안락사 선택을 부추기고 있다. 돈까지 주면서 무료로 안락사를 할 수 있게 한다. 결국 노인들에 대한 복지 재정부담보다 그것이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개인보다는 집단주의적 의식이 강한 일본 노인에게 미래와 애국하는 마음으로 용단을 내릴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플랜 75이다.
내가 영화에서 주목한 것은 누가 신청하는가이다. 영화는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과 함께 신청자가 신청 전의 생활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인다. 소위 후기고령자에 속하는 78세 여성의 생활이 상세하게 보인다. 그는 호텔 청소부로 일한다. 다행히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 4명이 함께 친구도 하면서 일을 한다. 그런데 가장 높은 연령의 동료가 일을 하다 쓰러지고 만다. 이런 사태에 대하여 ‘노인이 일하는 게 불쌍하다’고 호텔 투숙객이 투서를 한다. 이 투서를 핑계로 호텔은 이들을 해고한다. 꽃다발을 받으며 퇴사한 이들은 갈 곳이 없다. 일자리를 찾아보려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집도 지역 개발로 인하여 퇴거당하게 되어 새집을 알아보지만 임대인들이 독거노인을 꺼린다. 동료 중 한 명이 고독사를 한 것을 본 주인공은 플랜 75의 신청자가 된다. 또 다른 신청자, 남성 고령자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그는 식사를 무료급식소에 해결하고, 돈이 들어오는 일은 거리에서 휴지 줍는 것이다. 냉장고도 없는 생활을 하는 그도 신청자가 된다. 이렇게 플랜 75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고령자들이 선택하게 된다. 그 선택은 순수한 개인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정부는 플랜 75가 고령자의 용기 있는 멋진 선택임을 해맑은 얼굴을 한 70대 연기자가 미디어에 나와 끊임없이 홍보하는데, 그래서일까, 신청하러 온 사람들의 얼굴은 밝지는 않지만 극히 침착한 표정이다. 자신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불운해서가 온 것이 아니라, 극히 아름다운 선택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려는 의지의 표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퍼펙트 데이즈』를 살기 위해서
난 영화를 감상하고 나오면서 최근에 본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떠올랐다.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란 대사가 기억에 남는 영화다. 왜 이 영화가 떠올랐을까? 아마도 일본 영화라는 공통점과 독거 고령 노동자의 삶을 두 영화가 공통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퍼펙트 데이즈』 영화는 화장실 청소부의 하루하루를 보여준다. 아직은 플랜 75의 대상이 되지 않는 고령자인 듯하다. 화장실 청소부로 일할 수 있게 허용된 나이라면 말이다. 그는 화장실 청소를 하지만 하루하루 퍼펙트 데이로 살아간다. 유명한 대사처럼 그에게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을 살면 된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일하면서, 선술집에서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중고서점에서 책을 사서 잠자기 전에 읽는 충만한 하루를 보낸다. 그의 자세에 내 현재 모습이 반성되고, 저렇게 살기를 바랐다.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보는 하늘은 얼마나 맑고 투명했는지. 마치 영화 속 인물이 청소하러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보는 하늘과 닮아 있어 기분이 좋았다.
『플랜 75』를 보고 『퍼펙트 데이즈』의 그를 생각한다. 그가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성실한 청소부의 쓰임은 언제까지일까. 그의 퍼펙트 데이를 가능하게 하는 마음가짐은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까. 아니 퍼펙트 데이를 가능하게 한 마음가짐으로 살면 플랜 75에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아침의 높은 하늘을 볼 수 있고, 노을진 하늘을 볼 수 있는 날들을 선택할 것인가. ‘다음은 다음’으로 고민을 넘길 수 있을까. 매일 퍼펙트 데이를 사는 마음으로 플랜 75도 미련 없이,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플랜 75를 선택할까.
『플랜 75』의 마지막, 주인공은 안락사 시설에서, 마지막 임종시간에 스스로 약물 투여하는 호흡기를 빼고 일어나 그곳을 나온다. 그녀는 익숙한 곳으로 간다. 일도 없고, 퇴거될 집이 있는 곳의 언덕. 바로 노을을 바라본다. 어쩌면 나 같은 극히 평범한 고령자는 퍼펙트 데이와 플랜 75를 왔다 갔다 하는지 모르겠다. 노동의 고단함과 고단함을 놓칠까 두려워하는 생활, 그러면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음을 지어보는 생활은 떨어져 있지 않다. 그 속에서 사회의 가치와 개인의 가치가 충돌한다.
끊임없이 사회는 개인의 효용도, 능력을 사회적 직업, 일자리 가치에서 찾으라고 한다. 찾으려고 노력해도 고령자에게는 그 벽은 높고 가깝지 않다. 그 벽의 언저리에조차 가까이 가지 못한다.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플랜 75의 영화 말미에 정부는 플랜 75가 성공적이라고 한다. 또 플랜 75에 민간기업 등이 참여하면서 경제적 파급효과가 컸다고 한다. 그러면서 플랜 65를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한다. 요즘 영화에 자주 나오는 디스토피아 세상은 주로 외부의 침입에 이루어지고, 세상이 갑자기 뒤바뀌어지면서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인다. 랜덤으로 희생자가 생긴다. 즉 디스토피아는 전멸로 나아간다. 그런데 『플랜 75』는 조용한 디스토피아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도한 감상일까.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나
어떻게 살 것인가. 플랜 75인가, 퍼펙트 데이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몫은 아닐 것이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영화에서도 정부는 적극적으로 플랜 75를 포장하고 있었다. 영화의 플랜 75의 배경인 초고령사회의 노년의 삶은 이미 한국에서 일상이다. 한국도 간접적으로 플랜 75를 실현하고 있는지 모른다. 영화처럼 제도화되어 있지 않지만, 경제적·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고령자들에 대하여 플랜 75를 외치고 있는 상황이나 진배없다. 그 표증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노년층의 빈곤율과 자살률이다.
OECD 국가 중 빈곤율이 가장 높다. 2022년 기준 39.7%이다. OECD 평균 15%의 2.5배 수준이다. 초고령사회인 일본은 20.2%이다. 이런 빈곤율은 연령이 높을수록 더 높아진다. 75세는 29.7%, 80세 이상은 54.0%이다. 60대 이하의 평균 빈곤율이 10% 이하인 감안하면 세대별 차이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66세 이상 여성 고령자의 빈곤율은 45.3%이고, 남성은 34.2%이다.(OECD 통계) 이렇게 세대간, 성별 빈곤율은 차이가 크다.
빈곤과 고립은 자살률로 나타난다. 2020년 한 해에만 국내 65세 이상 노인 3392명이 자살했다(보건복지부 자살예방백서). 국내 연령대별 노인 자살률은 60대 33.7명(10만 명당), 70대 46.2명 80세 이상 67.4명으로, OECD 평균(60대 15.2명, 70대 16.4명, 80세 이상 21.5명)보다 2.2배, 2.8배, 3.1배씩 높다. 이미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 이탈리아와도 꽤 차이를 보이고 있다(헬스 조선).
내년에는 한국도 초고령사회로 접어든다. 그렇다면 추세로 볼 때, 현재의 빈곤율, 자살률은 더 높아질 것이다. 자살률 제로는 기대할 수 없어도, 적어도 OECD 평균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를 위해서 존엄한 노년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선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