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통령 윤석열을 매우 한심하게 보는 편이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 실망한 적은 거의 없다. 실망은 기대가 있어야 하는 거다. 기대가 쥐뿔도 없는데 실망을 할 일이 뭔가?
지난주 대국민 끝장 담화인가 그거 할 때에도 난 별 감흥이 없었다. 당연히 실망도 하지 않았다. 뭘 기대를 한 게 있어야 실망하지. 온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대변인에게 반말 찍찍 하던 거? 그 인간 원래 그랬다. 평생 검사로 살면서 인간을 피의자로 보는 습관이 인이 박힌 사람인데 안 그랬겠나?
아, 신선하게 웃긴 건 하나 있었다. 사과는 했는데 어떤 부분에 구체적으로 사과하는지는 밝힐 수 없다고 한 거, 그거 하나는 신박하더라. 아무튼 기대라는 게 없으면 실망을 잘 안 한다. 내가 윤석열을 대하는 태도가 딱 이거다.
그런데 10일 윤석열이 골프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골프광으로 알려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더 친해지기 위해서 ‘골프 외교’를 대비하는 차원이란다. 이 소식을 보는 순간 속으로 와, 이 인간은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상식적인 범주에서 인간 대접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구나 확신을 가졌다.
조선일보가 외교 교본이냐?
나는 골프를 치지 않지만, 골프를 치는 사람에 대해 아무 불만이 없다. 다만 골프를 치는 사람이 주위에 골프를 강요하는 것은 좀 웃기다고 생각한다. 내가 종합일간지 경제부에서 일할 때 데스크가 골프광이었다. 그리고 그 데스크는 항상 나보고 골프 좀 배우라고 강권했다.
이유가 증권사 CEO 등 높은 사람(당시 나는 증권거래소 출입기자였다)과 만나 취재를 하려면 골프장이 최적의 장소라는 것이었다. 몇 시간 함께 라운딩을 돌다보면 여러 이야기를 하게 되고 친해진단다. 그래서 단독도 많이 물어올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심 웃겼기 때문이다. 증권사 CEO랑 골프를 치러 갔다고 치자. 돈도 증권사에서 내는 돈으로 말이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증권사 CEO가 나한테 뭔 이야기를 해주겠나? 그냥 지 회사 자랑이나 실컷 하겠지. 나는 그걸 또 [단독]이랍시고 써야 하고.
그런데 그게 뭔 단독이냐? 증권사 CEO가 하기 싫은 이야기를 써야 단독이지 지 하고 싶은 이야기 써주는 게 왜 단독인가? 기자가 증권사 홍보맨 노릇 해 주는 거지. 그래서 난 골프를 절대 배우지 않았고, 증권기자 노릇도 아무 탈 없이 했다.
골프장에서 우아하게 담소 나누는 거?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뭔가 대단한 역사가 이뤄질 것이라 착각하는 거. 그건 진짜 착각의 영역이다.
그런데 윤석열이 트럼프에게 잘 보이려고 골프 연습을 시작했단다. 첫째, 지금 이 시국에 윤석열이 골프채 휘두르고 대통령실 비서진들이 사장님, 아니 참, 대통령님 나이스 샷! 이런 거 외치는 게 국민들 눈에 좋게 보이겠냐? 둘째, 트럼프라는 블랙 스완을 맞아 예상되는 난국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도 모자랄 판에 골프 연습이나 처하는 외교냐?
셋째, 이 사실을 대통령실 누군가가 뉴스1 기자에게 흘린 모양인데, 참모진 수준이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냐? “우리 대통령님이 트럼프와의 외교를 위해 진짜 열심히 준비하시는구나” 이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건데 그딴 참모들이랑 외교 전략을 짜고 있으니 될 일도 안 되겠다.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하란 이야기다.
윤석열이 왜 골프 연습을 시작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요즘 언론사 중 유일하게 윤석열 편을 드는 곳이 조선일보다. 그런 조선일보가 주말마다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라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그런데 마침 9일 이 시리즈의 제목이 ‘尹 대통령에게 필요한 트럼프와 아베의 브로맨스’였다. 그리고 기사에서 “아베가 트럼프와 골프를 열심히 쳐서 브로맨스를 다졌다. 그래서 외교에서 얻은 게 엄청나다. 윤석열도 이런 걸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딱 하루 뒤인 10일 나온 소식이 윤석열이 골프 연습을 시작했다는 거다.
이게 우연인가? 그럴 리가 없다. 윤석열이 유일한 자기 편 조선일보의 가이드를 따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진짜 쌍으로 XX들이신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숨도 안 나온다.
아베가 얻은 게 뭔데?
일본의 전직 총리 아베가 트럼프와 골프를 치면서 알랑거렸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심지어 골프에 앞서서 일본은 두 정상에게 점심 식사로 햄버거를 대접했는데, 미국산 쇠고기로 만든 햄버거를 특별 주문했단다. 트럼프 기분 맞춰준다고 당시 세계 랭킹 4위였던 마츠야마 히데키 선수까지 불러 라운딩을 돌았다. 속된 말로 접대 골프를 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얻은 게 뭐였을 것 같은가? 트럼프가 아베를 ‘신지’라고 친근하게 불러준 거? 그게 성과라면 트럼프가 윤석열에게 “우리 석열이” 한 마디 해주면 아주 쓰러지겠다.
당시 골프외교(라고 쓰고 알랑방구 외교라 읽어야 함)를 통해 아베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골프장에서 시시덕거리던 트럼프는 이튿날 공동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아베 총리가 미국의 군사 장비를 많이 구입해 줄 것이다”라며 신나했다. 아베가 뭘 얻은 게 아니라 호구를 잡힌 거다.
또 한 가지, 일본 언론들이 아베가 얻은 것으로 꼽았던 게 트럼프가 무역 압박을 유예해줬다는 거다. 당시 트럼프는 아베 정권과 무역협상을 진행 중이었는데 골프 회동 직후 “협상의 많은 부분은 일본의 7월 선거 이후까지 기다릴 것”이라는 글을 SNS에 올렸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일본은 이듬해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일본이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참패하면 아베 정권은 선거에서 치명상을 입는다. 그래서 트럼프가 이 협상을 선거 이후로 미뤄주겠다고 양보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일본에 이익인가? 천만의 말씀. 아베에게만 이익이었다. 왜냐하면 트럼프는 협상을 연기했을 뿐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베는 시간을 얻었지만 일본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실제 트럼프는 골프접대를 잘 받고도 “미국의 대일본 무역적자가 상상을 초월한다”며 압박의 강도를 낮추지 않았다.
트럼프는 또라이지 바보가 아니다. 골프 접대 좀 받았다고 그가 헤벌쭉할 것이라 기대한다면 그게 바보다. 그런데 이 중차대한 시기에 윤석열이 선택한 외교 준비가 골프 연습이라니, 나는 진짜 이자들이 미친 게 아닐까 싶다.
벌써 트럼프는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고 부르며 방위비 분담금을 100억 달러로 올리라고 압박을 하는 중이다. 어떻게 대처할 건데? 골프로 대처할 거냐? 윤석열이 트럼프에게 “럼프 형, 왜 그러세요. 우리 좋았잖아요. 좀 깎아주세요” 뭐 이럴 거냐고?
그러면 트럼프가 “우리 석열이 예뻐서 내가 좀 깎아줄게” 이러겠냐? 진짜 정신들 좀 차려라.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었는데, 트럼프와의 외교는 국가 운명이 걸린 문제다. 조선일보 말에 놀아나 브로맨스 어쩌고 하며 골프채나 휘두르는 대통령에게 트럼프를 감당할 능력이 있겠나? 진짜 이 나라 운명이 너무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