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하반기부터 지역의료기관과 장기 계약을 맺은 의사에게 월 400만원의 수당이 지급된다. 지역필수의료를 강화한다는 취지인데, 아직도 사업에 참여할 지방자치단체가 선정되지 않았다. 수당의 절반은 지자체가 내야 해, 재정 여력이 없는 지자체는 참여가 어렵다. 장기 계약 의사에게 제공하는 주거 지원도 지자체가 온전히 부담해야 한다. 정부가 의료 개혁을 주창하면서, 그 부담을 지자체에 전가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12일 보건복지부의 ‘2025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설명자료’에 따르면, ‘지역필수의사제 운영 지원’ 예산은 13억 5,200만원으로 편성됐다.
지역필수의사제는 지역의료기관과 5년 이상 장기 계약을 맺은 전문의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사업이다. 수당은 월 400만원이다. 의사를 지역으로 유인해 지역필수의료를 강화한다는 취지다. 4개 시도별로 3개 지역의료기관을 선정해, 의사 96명에게 수당을 지급한다는 계획이다. 내년에 처음 시범 사업 형태로 시행한다. 예산은 내년 하반기 6개월간 지급할 수당을 반영했다. 사업에 참여하는 의사에게는 수당과 더불어, 주거 지원과 해외 연수 지원이 제공된다.
정부는 지난 2월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민생토론회에서 의대 정원 확대와 함께 지역필수의사제를 의료 개혁 패키지로 제시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지역의료를 살리는 건 지역균형발전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지역필수의사제는 의사의 지역 근무에 대한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사와 지역의료기관이 계약을 맺는 형식으로, 의사가 중간에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도입을 주장해 온 지역의사제는 10년 의무 근무를 조건으로 의대 입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하는 내용으로, 강제성 측면에서 정부의 지역필수의사제와 차이가 있다.
사업 구체성도 미흡하다. 현재까지 사업에 참여할 의사를 확보하지 못했다. 지자체와 지역의료기관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복지부는 올해 연말까지 시도 현장 방문과 지역의료기관을 방문해 의견 수렴과 수요 조사를 할 예정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25년도 예산안 분석’ 보고서에서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자체, 해당 지자체에 소속된 종합병원급 이상 의료기관, 전문의 등 의료 인력의 참여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면서 “지역별 의료기관과 전문의 참여 의사에 관한 구체적인 현황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주거 지원 등 정주 여건 관련 기준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국회예정처는 “세부적인 사항이 구체화되지 않아 사전 준비가 미흡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수당 절반·주거 지원은 지자체 몫…“지역 불균형 심화”
지자체가 사업비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한다는 점도 제약으로 작용한다. 지역필수의사제는 정부와 지자체가 예산을 분담하는 국고보조사업이다. 월 400만원의 수당을 정부와 지자체가 절반씩 부담한다. 지원 대상자 규모가 확대될수록 지자체 부담이 가중되는 구조다. 복지부의 사업 예산 구성을 보면, 지역근무수당으로 11억 5,200만원을 편성했다.권역별 운영비로 2억원을 잡았는데, 사업에 참여하는 4개 시도에 인건비와 운영비를 정부와 지자체가 각각 50%씩 지원한다.
의사를 유인할 핵심 요소인 정주 여건 개선과 외국 연수 비용은 지자체가 온전히 떠안아야 한다. 복지부 예산안에는 관련 비용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
재정 여력이 없는 지자체는 사업에 참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수당과 주거 지원, 해외 연수 지원 등 지역필수의사제에 비용을 투입하면, 지자체는 그만큼 자체 사업을 진행할 돈이 줄어든다.
국회예정처는 “이 사업 예산안은 지자체 보조사업으로 편성돼 지방비 매칭(50%)이 필요한 사업이므로, 지방비 확보 가능성이 전제돼야 추진이 가능하다”면서 “정주 여건 지원 비용에 대해서는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부담해야 해, 재정적인 여력이 부족한 지자체 참여가 저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역필수의사제는 지자체에 대한 사업비 부담 전가로, 오히려 의료 불균형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김민재 보건의료노조 정책국장은 “지방의료원 사업 등 지역필수의료 관련 사업은 대부분 국고보조율 50%의 매칭 구조”며 “재정 자립도가 높은 서울 지역과 재정 자립도가 낮은 강원도의 보조율을 동일하게 50%로 매칭하는 건 지역 불균형을 심화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역필수의사제를 해보고 싶다는 지자체가 있어도 사업에 참여할 수가 없다”며 “지역필수의료를 살리겠다면 정부가 책임지는 방식으로 가야 하고, 적어도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구분해 보조율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지역필수의사제 성패가 지자체 재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지난 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서영석 민주당 의원은 조규홍 복지부 장관을 향해 “국비는 50%만 지원하고, 지방정부에 정주 여건 지원, 교육지원비도 지자체에 떠넘기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서 의원이 “이런 형태로 정책이 실현 가능한가”라고 따져 묻자, 조 장관은 “지역필수의사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정부 지원뿐 아니라 지자체의 협조가 필요하다”며 “지자체에서 정주지원 같은 계획이 확정되면 2026년도 시범 사업에 있어서는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이미 지자체 재정은 위기 수준에 내몰린 상황이다. 정부는 2025년도 예산안에서 노인 돌봄과 자립준비청년 지원 등 복지 사업의 보조율을 낮췄다. 보조율 하향에 비례해 지자체 부담이 늘어난다. 또한, 정부는 대기업·부자 감세 여파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대규모 세수 펑크를 내자, 2년 연속 지방교부세를 대거 감액한다는 방침이다. 정부가 재정 운용 실패를 지자체에 전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최혜지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정부가 의사 수 늘려 지역필수의료를 활성화하겠다고 홍보해 놓고, 재정적으로는 책임지는 데 한계가 있으니 부담을 지자체에 떠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