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만고 끝에 ‘쿠팡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을 성사시킨 3명의 유가족들이 12일 다시 국회 앞에 모였다. 청원안은 청원 성사 기준인 5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소관 상임위원회로 회부됐지만, 국회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한 탓이다. 애타는 마음으로 국회 앞을 찾은 유가족들은 국회의 존재 이유를 물으며 청문회 개최를 간곡히 호소했다.
‘쿠팡노동자의 건강한 노동과 인권을 위한 대책위원회(쿠팡대책위)’와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과로사대책위)’ 등은 이날 유가족들과 함께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쿠팡 청문회’ 청원은 쿠팡 심야 로켓배송으로 일하다 숨진 고 장슬기 씨 아버지 정금석 씨와 쿠팡CLS 캠프에서 프레시백 세척 작업을 하다 쓰러져 숨진 고 김명규 씨 배우자 우다경 씨, 칠곡쿠팡물류센터에서 일하다 숨진 고 장덕준 씨 어머니 박미숙 씨가 힘을 모아 낸 청원으로, 지난 7일 5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성사됐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유가족들은 청원에 동참한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 여전히 제대로 된 사과와 재발방지대책을 내놓지 않는 쿠팡을 한목소리로 질타했다.
고 장덕준 씨의 어머니 박미숙 씨는 “근로복지공단에서 내려진 (업무로 인한 산업재해) 판정도 인정할 수 없다며 4년 전과 같이 덕준이 죽음의 원인에 대해 다투고 있다. 쿠팡은 시간이 지나면 죽음도 없었던 일이 되는지 사망이 한 건도 없는 안전한 회사라고 공공연하게 자랑했다”며 “4년이 지난 지금, 쿠팡에서는 덕준이와 같이 또 누군가의 아들과 남편이 가족 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고 있다. 쿠팡은 덕준이의 죽음 때와 같이 ‘회사는 책임이 없다’며 선을 긋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미숙 씨는 “이제는 죽음을 멈춰야 한다. 쿠팡이 사실을 왜곡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짓을 멈추게 해야 한다”며 “지금까지 쿠팡에서 죽어간 감추어진 죽음들을 조사하고, 사과와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다시는 죽음들이 숨겨지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관리 감독해야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죽음이 반복되지 않게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고 김명규 씨의 배우자인 우다경 씨도 “로켓배송의 ‘빨리빨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노동자들이 새벽배송 때문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며 “그럼에도 쿠팡은 사람의 목숨을 회사에서 쓰는 소모품보다도 취급하지 않고 있다.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쿠팡, 잘못을 해놓고도 사과할 줄 모르는 쿠팡. 더 이상은 노동자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국회에서도 방치하지 말아 주시고, 청문회를 꼭 열어 진상을 밝혀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국감에서 고개 숙인 쿠팡CLS, 정작 유가족에겐 ‘조용히 해결하자’ “청문회 없으면, 쿠팡 문제 해결 안 할 것”
쿠팡의 노동환경은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도마에 오른 바 있다.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한 홍용준 쿠팡CLS 대표는 근로복지공단에서 고 정슬기 씨의 산업재해가 인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자리를 빌어서 쿠팡과 관련된 업무를 하시다가 돌아가신 고인과 유가족분께 진심으로 애도의 말씀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고개를 숙였다.
쿠팡CLS 측에서는 정슬기 씨의 아버지 정금석 씨에게도 슬기 씨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며, 유가족과 만나고 싶다는 취지의 연락도 취했다고 한다. 그런데, 쿠팡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정금석 씨에게 쿠팡CLS 관계자가 찾아와 꺼낸 말은,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방지책이 아닌 사실상의 합의 종용이었다.
정금석 씨는 민중의소리와 만나 “찾아와서 하는 얘기가, ‘가족 문제니까 조용히 해결하자’고 하더라. 개인적인 문제니까 그만하고 조용히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얘기 아닌가”라며 “이제 사회 문제가 됐으니 그럴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하니 아직까지 소식이 없고, 국회에서는 자신이 사과하러 갔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청문회에서 제대로 따지지 않으면, 쿠팡은 성의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금석 씨는 국회 청문회가 “마지막 보루”라고 강조했다. 그는 “계속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쿠팡에 대해 청문회를 열고, 좋은 기업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쿠팡에서 오늘도 자행되고 있는 무리한 심야노동, 로켓배송, 클렌징 제도를 없애고 공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노동시스템을 만들어 달라”며 “쿠팡과 관련이 있는 국토교통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정무위원회가 합동 청문회를 열어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하고, 가족들과 작은 행복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 다시는 저희 가정처럼 무너지는 가정이 생기지 않도록 해 달라”라고 말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도 유가족과 함께 조속한 쿠팡 청문회 개최를 요구했다. 쿠팡 대책위 공동대표인 정의당 권영국 대표는 “국회가 청문회를 개최해 컨베이어 속도에 맞춰 휴게시간 없이 쉼 없이 돌아가는 숨 막히는 노동조건,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노동강도, 아무런 제한 없이 이뤄지는 연속적인 야간노동, 냉난방 시설 없이 폭염과 혹한에 그대로 노출되는 비인간적인 노동환경, 상시 지속적 업무임에도 일용직, 계약직 고용으로 자유로운 해고를 가능하게 하는 고용구조의 실태를 조사하고 감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대표는 “21대 국회에서 5만명 이상 동의한 청원이 110건이었지만, 이중 처리된 청원은 11건에 불과했다. 청원에 대한 국회의 답변이 매우 미진함을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다”며 “노동자의 목숨과 안전을 지키고자 한다면, 국회는 쿠팡 청문회 개최로 응답해야 한다. 청원에 동의한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경고했다.
‘쿠팡 택배노동자 고 정슬기님과 함께하는 기독교와 시민사회대책위원회’ 남기업 공동대표는 “쿠팡이 유가족에게 사과도, 제대로 된 재발방지 대책도 내놓지 않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이 회사와 관계없다는, 회사의 책임이 없다는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는 까닭은 국회가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이라며 “속히 쿠팡 청문회를 열어 국회의 존재 이유를 보여달라. 쿠팡 청문회를 열지 않는 것은 쿠팡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계속 죽음의 위협에 방치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로사대책위 강민욱 집행위원장도 “국회는 국민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라며 “특히 지난 9월 환노위 여야 간사들은 국감 이후 청문회 개최에 합의한 바 있다. 환노위와 국토위는 좌고우면하지 말고 지금 즉시 쿠팡 청문회를 개최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같은 날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쿠팡 청문회 개최를 위한 여야 간사의 조속한 합의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진보당 정혜경 의원은 “국감을 마무리하면서도 말했지만, 쿠팡은 과로사의 본질인 클렌징 제도는 그대로 두고 조삼모사 대책을 내놓고 지금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고 있다. 유족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청문회가 필요하다”며 “이 산재 사고의 해결을 위해서는 생활물류서비스발전법을 근거로 운영되고 있는 택배서비스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국토위와의 합동 청문회가 절실한 만큼, 위원회 차원에서 관련한 논의가 진행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소속 안호영 환노위원장은 “쿠팡 청문회 문제는 국감 이전에도 여야 간사 간 협의된 과정도 있었고, 최근 5만명 이상 청원된 부분이 있어서 환노위 청원소위에서도 다뤄야 하지 않을까 보고 있다”며 “관련해서 여야 의원들과 간사들 간 협의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