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미학예술 분야의 책을 꾸준히 읽어왔다. 직업 때문이다. 대중음악의견가로서 음악을 듣고 보는 관점을 깊고 정교하게 벼리고 싶었다. 멜로디, 리듬, 사운드, 장르 같은 음악언어만으로 음악을 분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이미 다른 이들이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방식이다. 음악을 일반적인 예술 창작물 중 하나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예술과 사유를 논해온 사상가들의 시선을 빌어 접근하고 싶었다. 프로이트, 라캉, 들뢰즈, 존 버거, 벤야민, 테리 이글턴, 바디우, 루카치, 프레드릭 제임슨의 주요 저작을 읽어온 이유다.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예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확인해 이론의 힘으로 예술과 창작의 함의를 파헤치고 싶었다. 그래야 제대로 된 평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음악평론에서 들뢰즈나 루카치를 인용하는 경우가 드문데, 문학평론과 미술평론과 영화평론에는 흔하다. 그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관련 책들을 꾸준히 읽어왔음에도, 책을 읽은 만큼 깊이 있고 남다른 평론을 해왔다고 주장하기는 불가능하다.
사실 10년 이상 저 책들을 읽어온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인문학이나 미학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수없이 들어보았을 만큼 위대하다는 사상가들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평론가가 되기 전부터 궁금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이렇게 권위 있고 계속 인용하는지 알고 싶었다. 다른 이들이 글을 쓸 때 써먹는 유명한 개념 몇 개를 요점 정리하듯 파악하고 끝내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읽으려면 제대로 읽고 싶었다. 중요한 저작은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고 모임을 만들고 책을 선정해 함께 읽었다. 혼자서는 다 읽기 어려운 책들이었다. 같이 읽고 서로에게 물어가며 읽어야 억지로라도 읽고 덜 헤맬 수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남들이 어디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고 싶어하고, 왜 인기인지 궁금해 한다. 특히 전문가들의 추천 리스트에 관심이 많다. 전문가들이 뽑은 책, 영화, 음악, 연극, 식당 리스트를 항상 찾아본다. 전문가들이 연말 결산으로 뽑은 책과 영화는 저장해두고 틈틈이 찾아본다. 참여하는 공부모임 한 곳에서 장애와 건강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은 이유도 호기심 때문이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들이 장애와 건강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이 분야의 활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해 이슈가 되니 꼭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귀가 얇다고 해야 할까. 새로운 무언가가 화제가 되면 쏠려가는 편이다. 2022년 클럽하우스 열풍이 불 때는 틈만 나면 클럽하우스를 열어보곤 했다. 그렇다고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람 같지는 않다. 오히려 호불호가 명확하고 정치적 태도가 확실하다. 다른 이들이 쓴다고 새 물건을 사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품을 수 있는 세상은 겨우 한 줌일 뿐이고, 세상 모든 일에 눈과 귀를 열어둘 시간이 없기도 하다. 다만 궁금한 게 많고 뒤처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필요하다면 시간을 내서라도 따라 가고 싶다.
그러다보니 관심사와 생각이 조금씩 바뀌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결 같이 음악을 좋아하고 세상에 관심 많은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30년 전의 나와 20년 전의 나는 다르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역시 다르다. 1990년대 말만 해도 아이돌 음악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이돌 음악을 편견 없이 들으려 노력한다. 소속 정당은 민주노동당에서 노동당으로, 노동당에서 녹색당과 정의당으로 옮겨왔다.
대학시절 어쩌다보니 NL이었던 탓에 반미, 조국통일, 민족해방, 민주정부, 전민항쟁 같은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았다. 아쉽게도 학교에는 다른 정파의 운동권이 많지 않아 다른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저학년 때는 아는 것도 적었다. 그러다 90년대 중반 NL 내부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PC 통신으로 만나면서 호기심이 꿈틀거렸다. 그 때 전북총련, 경인총련,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의 NL에서 다른 논의와 활동이 이어졌는데 그게 더 맞는 이야기 같고 흥미로웠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혼자 찾아가 만나기도 했으며, 결국 조금 다른 NL 노선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씨네21과 키노 같은 잡지들이 등장했을 때, 호기심은 대중문화로 이어졌다. 유앤미블루와 삐삐밴드를 좋아하게 된 이유다. 그 때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던 영화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문가들의 추천작을 찾아보면서 다른 세계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한 후에는 접하지 못했던 관점을 가진 PD성향 당원들의 이야기에 귀가 열렸다. 그즈음 김규항, 김진숙 같은 이들의 말과 글을 읽게 되면서 노동계급의 당파성을 지키고 자본주의와 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뒤늦게 좌파의 세례를 받은 셈이다. 호기심을 자극한 건 좌파만이 아니었다. 《녹색평론》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면 생태주의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참 뒤 이야기지만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었을 때 세미나 모임에 낀 이유 역시 호기심 때문이다. 성소수자, 장애인의 삶, 인권에 대해 알고 싶었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주변에서 이야기를 많이 하니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정치적으로 올바를 것 같다는 압박감, 이왕 알 거라면 제대로 알고 싶은 완벽주의,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대상을 나도 따라 알고 싶어하는 지적 허영은 번번이 새로운 세계로 나를 떠밀었다.
50년 동안 나를 끌고 온 것이 호기심만은 아니었지만, 호기심 덕분에 계속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그 세계에는 여성이 있고, 성소수자가 있고, 장애인이 있었다. 노인과 빈민과 노동자도 있었다. 수도권밖에 사는 사람과 대학에 다니지 않은 사람, 이주민, 채식주의자, 동물도 그 곳에 있었다. 그들 덕분이다. 그들과 함께 싸우는 활동가와 그들을 주목한 언론, 작가들 덕분이다. 다른 삶, 다른 정체성, 다른 지향을 가진 세계를 만난 덕분에 나의 좌표는 다른 존재, 아픈 생명, 죽어가는 생명, 이미 죽어버린 생명, 그들 곁에서 싸우는 사람들과 너무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의 순서와 정서가 바뀌었다. 민족, 통일, 반미보다 인권과 평등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실제로 새로 회원가입하거나 후원하는 단체들은 장애, 빈민, 여성 의제의 단체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다른 세계를 제대로 만났다거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겨우 책 몇 권 읽었을 뿐이다. 글 몇 편 읽었을 뿐이다. 그들과 일해보지 않았고 살아보지 않았다. 안다고 과시할 일이 아니다. 그들의 존재를 안다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자부할 일도 아니다. 미처 하나의 사상이 되지 못한 호기심일 뿐이다.
그런데도 예전에 알던 사람들, 한 때는 좋아하고 친했던 사람들과 멀어졌다. 옳다고 생각하는 길, 호기심을 자극하는 길로 걸어왔을 뿐인데 관계가 소원해졌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조국과 박원순,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에 대한 생각이 확연하게 갈라지면서 친소관계가 재구성되었다. 아쉽고 서운하고 속상하고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의 관점에서는 내가 옳고 상대가 틀렸겠지만, 상대의 관점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로 아웅다웅하는 것일 수도 있고, 갈라져 쓸쓸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이 예전과 달라져서, 내가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른 생각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더라도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을 찾아 의기투합했겠지만, 중요한 가치 가운데 몇 가지는 놓쳤을 것이다. 놓치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호기심이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지구 위 한 생명으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이해하고 존중하고 연대해야 할 존재들과 만나게 해준 셈이다. 호기심이 원동력이다. 호기심이 나를 굴려간다. 오늘도 여기저기 기웃대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