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창립 30주년을 앞두고 연 정책대회의 첫날.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끝난 일정에도 지친 기색 없이 회의장을 빠져나온 민주노총 인천본부 이미영 사무처장은 정책대회 참여 소감을 묻는 질문에 웃으며 답했다. 기록적인 폭설에 정책대회가 열린 강원도 정선까지 오는 길도 험난했지만, 이 사무처장은 “그래도 오기를 참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사무처장은 올해로 민주노총의 조합원이 된 지 6년 차다. 그는 “역시나 직접 만나야 되는구나라는 것을 느꼈다”며 “산별노조 혁신 강화 토론회 세션에 참여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되게 많았다. 자리가 없어서 바닥에 앉아 있기도 했는데 평소에 다른 산별연맹에 가지고 있던 약간의 거리감과 선입견들이 많이 깨졌다. 만나서 대화를 하니까, ‘저럴 수도 있겠구나, 실제로는 저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구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전국에서 모인 2천여명의 조합원들, 2박 3일간 첨예한 주제 4가지 두고 열띤 토론 브라질노총 ‘정치세력화 전략’ 강연에도 뜨거운 호응
27일부터 29일까지 2박 3일간 열린 민주노총의 정책대회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산별노조 혁신·강화 ▲조직운영과 혁신 ▲사회 변화에 따른 노동운동 대응 전략 등 4가지 큰 주제로 구성된 17개 세부 일정으로 채워졌다. 전국에서 모인 2천여명의 현장 간부와 조합원들은 세션마다 빼곡히 채워진 일정 중 원하는 주제의 일정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외에도 브라질노총과 프랑스노총을 초청해 강연 및 대담을 진행하는 시간도 준비됐다.
가장 호응도가 높았던 시간은 ‘브라질노총의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 전략’ 초청강연 및 대담이었다. 페르낭두 비첸지 비바우두 브라질노총 국제관계 사무국 조정자(이하 비바우두)가 브라질노총(CUT)에서 추진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브라질노총을 기반으로 창당한 노동자당(PT)이 집권까지 이르게 된 배경과 전략을 설명한 강연이었다. 군사독재와 이에 맞선 투쟁 등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 속에서 이룬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조합원들이 고대한 시간이기도 했다.
공공연대노조 서울본부 배재환 기업은행지부장은 브라질노총 강연을 듣기 위해 시간을 쪼개 정책대회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배 지부장은 “브라질노총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하루 전날 미리 왔다”며 “(브라질노총 출신인) 룰라가 대통령이 된 사연과 최하층에 있던 사람들 먼저 챙겨 중산층이 되게 하고, 초등교육조차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게 한 이야기를 듣고 관심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책대회가 진행되는) 2박 3일 일정에 다 참여하고 싶지만, 다음날(28일) 근무가 있어 오늘 하루를 빼서 왔다. 강연이 끝나면 바로 서울로 돌아가야 해 아쉽다”고 전했다.
비바우두는 강연에서 PT당을 만들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노동자들을 조직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지는 대담은 조합원들의 질문을 통해 이뤄졌다. 조합원들은 현재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민주노총의 현재 고민들을 주로 물었다. “브라질에서 진보정당은 PT당 외에도 많은데, 조합원들이 PT당만 전략적인 단결을 맺는 데에 불만은 없나”, “좌파 정당이 여럿인 조건에서 브라질노총 간부들이 다른 좌파 정당을 지지한다면 브라질노총의 단결이 많이 어렵진 않은가”라는 취지의 질문이 쏟아졌다. 비바우두는 “분쟁이나 갈등은 없다”며 “물론 우리 내부에서도 아주 격렬하게 논쟁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서로 존중에 기반해 대화하며 이견을 좁혀가는 과정을 우린 즐긴다고 볼 수 있다”고 답했다.
이미영 인천지부 사무처장은 이 대목이 인상적이었다고 꼽았다. 그는 “저도 정치세력화가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고민이 많았다. 지금 민주노총이 이 문제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브라질노총의 정치세력화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이 궁금했다”며 “비바우두로부터 긴 역사 속 쌓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과정을 들으며 우리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사례를 연구하고 우리의 경우와 비교하면서 방향을 잘 잡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편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사무처장은 “우리는 정파 간의 실질적인 문제를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걸림돌 중 하나라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브라질노총의 사례는 내부 운동가들 간의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갈등을 위한 갈등이 아니라, 정책적인 방향과 투쟁 방식을 치열하게 즐긴다고 하는 것을 보고 우리의 토론 문화나 동료를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 조금 더 성숙한 변화가 필요하겠구나, 그런 것이 쌓여 정치세력화에 대한 방법을 빨리 찾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사회적 대화 막는 건 스스로 영향력 축소하는 길” 사회적 대화 바라는 조합원들 요구도 분출
정책대회 둘째 날(28일) 역시 이른 시간부터 숨 가쁘게 돌아갔다. 두 번째 세션의 일정 중 하나인 ‘대전환 시대 노동운동 대응 전략 원탁회의’는 조합원들이 얘기하고 싶은 주제를 골라 6명씩 조를 이루고, 1시간 동안 토론한 뒤 그 결과를 요약해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지역도, 소속 조합도 서로 다른 이들이 원탁에 모여 앉았지만, 토론이 시작되자 다소 어색해 보이던 분위기는 금세 사라졌다.
이날 민중의소리가 취재한 한 조는 ‘대전환 시대, 민주노총 무엇을 해야 하나’와 ‘사회적 대화 어떻게 봐야 하나’라는 두 가지 주제를 두고 의견을 나눴다. 이 조에는 전남본부와 공공운수노조 공무직본부, 서비스연맹, 보건의료노조, 건설노조 소속 조합원들이 모였다. 다양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이 모인 만큼, 각 사업장과 지역에서 벌어진 상황들이 예시로 공유됐고,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토론에서는 “대전환 시대에 대한 정의부터 내부적으로 합의한 뒤 민주노총의 역할을 정해야 한다”는 제언부터, 지역에서 온열질환으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민주노총이 기후위기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다양한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을 ‘불평등’으로 진단하며 “지난 30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하려는 권력자들에게 끌려왔는데, 이를 제대로 평가하고 불평등 해소를 위한 새로운 30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개진됐다.
사회적 대화와 관련된 주제에서는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전에 있던 관습에 얽매여 사회적 대화를 하지 않는 건 맞지 않다. 사회적 대화로 우리의 의제를 전달하고 정책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책적으로 잘 준비해 ‘이 문제는 이렇다’는 입장을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제시해야 한다. 이를 모아내기 위해 의견을 수렴하고, 그렇게 주도하면 국민에게도 신뢰를 쌓일 것이고 국민들에게도 이해를 받으면서 투쟁할 수 있다”, “노정교섭을 하지 않으면서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사회적 대화에 적극 참여해 우리의 발언을 세게 해야 한다”, “민주노총의 영향력이 큰데, 사회적대화를 막는 건 스스로가 영향력을 축소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앞다퉈 나왔다.
‘사회적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자, “정말 토론하다 보면 다 똑같다. 그런데 왜 상층만 다른지…”라는 답답함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전날 발표된 온라인 설문 조사 결과에서도 “민주노총은 내셔널센터로서 조합원과 노동자에게 이익이 된다면 사회적 대화를 모색할 수 있다”고 응답한 조합원이 85.6%에 달했다. 이 여론조사를 언급하며 “80% 이상이 찬성하는 것이라, 상층보다는 조합원 민심을 따라야 하지 않느냐”, “정책대회에서 중요한 게 현장 조합원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 아닌가”라는 호응도 이어졌다.
토론을 마친 뒤 서비스연맹 기선옥 교선부장은 “이런 대화를 굉장히 나누고 싶었다”며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조합원이 된 지 이제 막 3년 차가 된 기 부장은 “서비스연맹이 아닌 다른 조직의 조합원들은 많이 만나지 못했는데, 정책대회를 통해 만날 수 있게 됐고, 다른 조합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해소할 수 있었다”며 “정책대회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이후 민주노총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꼭 반영이 됐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프랑스노총(CGT) 드니 그라브일 중앙 서기(이하 그라브일)의 ‘산별교섭 강화를 위한 프랑스 노총의 전략’ 초청 강연 및 대담도 이어졌다. 프랑스는 노조 조직률이 11%로, 한국(13%)보다 낮다. 하지만 단체협약(단협) 적용률은 90% 이상이며, 법에도 업종별 최저임금이나 산업안전 등은 반드시 산별 교섭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라브일은 ‘법이 만들어진 배경’을 묻는 질문에 “단협을 법에 명시한 건 상당한 역사가 있다”며 “1936년에 단협을 위한 대대적인 파업이 있었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이미 이 같은 단협은 있었다. 하지만 1981년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정부가 단협을 (법으로) 의무화하는 과정으로 넘어갔다”고 답했다.
다만 그는 “단협이 일반화되는 것으로 충분한 게 아니라 좋은 단협을 얻는 게 중요하다. 없어지는 직종도, 새로 생기는 직종도 있어서 이런 것들이 제대로 반영되려면 끊임없이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며 “한번 승리를 쟁취하더라도, 결국 사용자 측에서 또 다시 엎으려 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투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랑스노총의 전략에 대한 조합원들의 궁금증은 계속 이어졌다. 짧은 시간 접수된 질문만 70개에 달했다고 한다. 결국 준비된 시간 내에 모든 질문을 소화할 수 없게 되자, 접수된 질문을 서면으로 보내 추후 답변을 받기로 약속했다.
아울러 대담에서는 앞선 강연을 위해 참석했던 브라질노총 비바우두는 물론 일본의 노총인 전노련 인사들도 함께해, 브라질과 일본의 산별교섭 상황도 함께 공유하는 시간도 가졌다.
민주노총과 함께 30년 세월 보낸 조합원 “정책대회와 같은 자리 빨리 있었어야, 주기적으로 열리길”
궂은 날씨에 고된 일정이었지만, 정책대회가 진행된 2박 3일간 조합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정책대회가 열리기 전날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진행된 예술강사 촛불문화제를 진행한 뒤, 강원에서 열린 정책대회 일정까지 소화한 제주 지역 조합원도 있었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제주지부 이석진 예술강사분과장은 “민주노총에 가입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큰 규모의 정책대회는 참가해 본 경험이 없다”며 “민주노총에 이렇게 많은 노동조합 조직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 자체가 감동적이고 벅찬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이어 “더 많은 조합원들에게 정책대회와 같은 장이 마련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민주노총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시절부터 활동해 온 건설산업연맹 플랜트건설노조 하해성 경인지부 정책국장은 지난 30년간 이 같은 논의의 장이 마련되지 못한 데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이제라도 정책대회가 열리게 된 데 대해 환영했다.
그는 “조금 늦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빨리 했었어야 된다는 생각이지만, 지금이라도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힘을, 이 거대한 조직이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의 힘과 잠재력, 변화의 가능성을 확인하길 기대하는 정책대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덧붙여, 하 국장은 이번 정책대회를 통해 민주노총의 의결 기구인 대의원대회의 논의도 달라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는 “대의원대회에서는 왜 이렇게 되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라며 “전대협 시절 대의원대회로 기억하는데, 2박 3일 대의원대회를 하면 2~3천명이 모여서 열정적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투쟁하고 어떤 과제를 실현할 것인가 토론을 하고, 토론만이 아니라 어떻게든 의사결정을 하고, 그렇게 결정된 것을 관철하기 위해 박터지게 정권과 투쟁한 기억이 있다. 지금의 대의원대회는 논의의 질과 깊이가 높은 수준이 아니다. 의사결정을 힘 있게 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라고 아쉬워했다.
하 국장은 “이번 정책대회가 정책대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의 대의원 대회의 질과 결속력, 그리고 집행력을 혁신하는 계기도 되었으면 좋겠다”며 “물론 정책대회를 열기 위해선 공간도 필요하고, 비용도 많이 들긴 하지만 주기적으로 열었으면 좋겠다. 더 중요하게는 대의원대회가 내실 있게 토론하고, 의사결정을 하고, 그걸 집행하는 구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정책대회는 계획부터 준비까지 꼬박 1년여의 시간이 걸린 사업이다. 민주노총의 30년을 돌아보고, 조합원들의 생생한 의견을 반영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9~10월에는 조합원들의 실제 의견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토론과 여론조사를 진행했는데, 총 581개 사업장에서 4,818명의 조합원이 현장토론을 벌였고 7,827명의 조합원이 여론조사에 참여했다.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은 폐회식을 통해 “현장의 복잡한 문제들을 조금은 뒤로 하고, 민주노총의 전략과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조합원과 집중해서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참 소중했다. 민주노총도 2박 3일간 모아낸 성과와 조합원 의견을 유실하지 않도록 잘 이어가겠다”고 약속했다.
양 위원장은 “시대 변화에 따라서 노동운동의 전략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는 오늘 끝낼 고민이 아니라 이제 시작해야 될 고민”이라며 “그런 고민과 그런 물음을 동지들의 머릿속에 그리고, 그것을 헤쳐나가고 극복하겠다는 결심을 동지들의 가슴속에 담고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