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치러진 제4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됐다. 이로써 트럼프가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 바이든에게 패했을 때 “트럼프가 물러나도 트럼피즘(Trumpism)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던 우려가 현실이 됐다.
트럼피즘은 군사·외교정책상의 불개입주의와 고립주의, 경제정책상의 보호무역주의, 정치이념상의 대중우익주의(우익 포퓰리즘), 문화적으로 보수주의·복음주의를 표방한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트럼프는 전 세계 70여 개국에 미국의 이익을 위해 빨대처럼 꽂아놓은 800여 개의 미군 기지를 철수해야 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지원도 당장 끊어야 한다. 나토(NATO)나 한국을 향해 군비를 더 내놓으라고 을러대지도 말일이다. 다른 나라에게서 ‘삥’을 뜯어 자국의 군사력을 유지해온 수법은 고대 그리스 시절 아테네 제국부터 있어 온 일인데 이런 짓거리를 제국주의라고 한다. 지금까지 등장한 정치 이념(행태) 가운데 트럼피즘만큼 모순된 정치 이념은 파시즘 밖에 없다. 파시즘은 순수한 이념형을 구하기 어려운 잡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잡탕에도 진심인 무엇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한때 제조업으로 융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산업지역 빈곤한 백인 계층의 반란에서, 정체성 정치의 외곽으로 밀려난 백인 주류·보수층의 반격에서 트럼피즘의 진심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백인 대중의 경제적 빈곤과 문화적 불만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트럼피즘 구호에 반응했다는 것이다. 완벽한 설명인 듯하지만, 이 또한 모순되기는 마찬가지다. 먼저 미국과 같은 인종주의 국가에서 공장이 문을 닫기 직전에 가장 먼저 해고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또 미국의 주류·보수층이 소위 자유주의자들의 정체성 정치에 넌더리를 냈다지만, 주류·보수층이 일관되게 행사해온 ‘백인-기독교-반공주의’라는 정체성 정치를 거부하는 것이 왜 비난받을 일인가? (미국 사회의 정체성을 이루는 ‘반공주의’는 ‘미국 예외주의’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로 뭉개져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대학에서 1930년대 암흑기의 유럽이나 억압적이었던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 붕괴를 주제로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두 사람은 트럼프 1기(2017~2020) 행정부가 출범한지 1년이 조금 지난 2018년,『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어크로스,2018)를 출간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11쪽)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지은이들은 그 동안 베네수엘라·조지아·헝가리·니카라과·페루·필리핀·폴란드·러시아·스리랑카·튀르키예·우크라이나 등의 나라에서 선거로 추대된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한 사례를 연구했다.
그랬던 지은이들은 이 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즉 미국의 사례”(6쪽)가 자신들의 연구 과제가 될 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지은이들은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에서 미국 정치가 무규범을 넘어 무법 상태와 폭력 사태로 치달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2016년 공화당 대선 지명은 버서(birther: 출생이라는 뜻의 단어 ‘birth’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을 붙인 조어. 2008년과 2012년 대선 때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 태생이 아니기 때문에 피선거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음모론가들을 지칭함) 운동가인 트럼프에게 돌아갔고,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를 범죄자라고 불러댄 공화당 전당대회장은 “그녀를 구속하라”는 구호로 메아리쳤다. 트럼프는 2016년 선거운동 기간에 지지자들의 폭력을 용인했을 뿐 아니라 이를 조장했다.
미국 정치가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말살하기로 했던 최초의 사례는 노예해방을 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이 대치하던 1830년에서 1860년 사이였고, 연이어 남북전쟁이 터졌다. 60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남북전쟁 세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양당은 공생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이면서 양극화 현상이 서서히 희석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향후 미국 민주주의의 특성으로 자리 잡았다.”(161쪽)
민주주의는 물론 제도이지만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민주주의 제도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제도만큼이나 민주주의 규범(democratic norm)이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돌아가고 오랫동안 이어지기 위해서는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한다. 지금까지 두 가지 기본적인 규범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미국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 두 가지 규범이란 정당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관용(mutual toleration)과 이해(understanding), 그리고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forbearance)를 말한다. 이 두 규범은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 민주주의 기반을 강화해왔다.”(15쪽)
지금까지의 논의는 미국의 양당제도가 트럼프 이전에는 신사들끼리의 아기자기한 회합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그럴 때 트럼프는 그런 이상적인 회합장(민주주의)에 뛰어든 문제아다. 이런 순진·소박한 논의가 계속된다면 더 이상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은이들은 미국의 양당이 유지해온 화합이 인종문제를 논의의 테이블에서 치워버린 결과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민주당과 공화당, 아니 미국 정치가 그동안 극단적인 양극화(적대)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인종문제를 덮어 둔 때문이고, 세계인들이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모범’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지은이들은 통렬하게 고발한다. 미국의 정당인들이 체득한 상호관용·이해·자제라는 “미국 민주주의 규범의 핵심은 인종차별과 함께했고, 또한 그것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289쪽)
미국의 민주주의 규범은 1960년대, 남부의 흑인 차별법인 짐크로법을 철폐하기 위한 시민권 혁명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2008년 버락 오바마가 아프로-아메리카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완전히 깨졌다. 오바마 당선 직후 백인-기독교-반공주의자들로 이루어진 티파티 운동과 버서는 오바마를 악마·빨갱이로 몰아붙였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트럼피즘 구호는 이때 싹이 텄다. 미국의 인종 구성이 백인 우세에서 유색인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결핍과 위기를 느낀 백인들이 트럼피즘에 매달렸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결론이다. “다민족 민주주의는 미국의 중차대한 과제다. 지금 여기서 후퇴할 수는 없다.”(285쪽)
필자주
제목 ‘Dark Side of the Trumpism’은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The Dark Side of the Moon’에서 빌려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