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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김민기·방의경·한대수를 듣는 계엄해제의 아침

윤석열 대통령이 긴급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령을 발표한 가운데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내부로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다. 2024.12.04. ⓒ뉴스1

원래는 다른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어젯밤 윤석열 대통령이 갑자기 긴급담화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후 밤을 꼬박 새웠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상황은 일단락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마침표를 찍었다고 할 수 없다. 사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싶다. 간밤에 악몽을 꾼 것 같은 얼떨떨함을 좀처럼 털어내기 어렵다. 앞으로 세상은 윤석열 정부 퇴진 정국으로 소용돌이치지 않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왜 그랬는지, 어떻게 비상계엄을 준비했는지, 누가 그와 한패였는지 차츰 밝혀지지 않을까.

문득 김민기를 듣고 싶고, 한대수를 듣고 싶어지는 아침이다. 비상계엄과 긴급조치의 시대를 통과한 음악을 들어야 할 것 같은 아침이다. 그 야만의 시간을 거치며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의 노래를 다시 들어보자.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이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어젯밤 보여준 모습은 바로 박정희, 전두환의 재판再版이었을 뿐이다. 국가권력이 비상계엄과 긴급조치를 선언하면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던 시대. 그래서 시인 양성우가 ‘겨울공화국’이라고 부르던 시대, 김민기·신중현·한대수 같은 이들이 금지곡 판정을 받고 활동을 중단당한 시대로 거침없이 돌아가려는 대통령, 계엄 포고령을 어기면 ‘처단’하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어떻게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김민기 친구(1971년)

그들은 그동안 세상의 변화에 짓눌려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민주주의 따위는 아무렇게나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라는 말 속에 어리는 박정희·전두환의 그림자를 보라. 국회의장이 소집을 명령했음에도 국회로 모이지 않고 당사에 모여 허송세월한 국민의힘 국회의원 대부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수호자이고 헌정의 계승자인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기실 윤석열 대통령이 벌인 내란에 동조한 반란세력일 뿐이다. 박정희·전두환 정부를 거치며 뿌리내린 파시즘 독재를 동조하고 내면화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행동 아닌가. 우리는 이런 자들에게 권력을 위임해왔다. 대한민국 시민 중에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시대에 김민기는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라고 물었다. 그저 친구의 우연한 죽음을 노래했을 뿐이지만 그의 노래는 죽음의 시대를 흔드는 묵직한 질문이 되었다.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라는 탄식은 누군가가 죽음을 각오하고 용기를 내도록 이끌었다. “아무도 듣지 못”했던 “저 부는 바람”에 귀 기울이게 했고, 기어이 “꽃밭 가득히” “무궁화꽃 피”워야겠다고 마음 먹게 했다. 1970년대는 독재와 자본에 굴종한 인간만 남긴 게 아니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라고 선언하는 인간을 함께 남겼다. 한대수의 2집 [고무신] 표지 사진처럼 철조망에 낀 고무신을 직시하는 인간, 방의경의 노래 ‘불나무’ 속 불나무 같은 존재를 외면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한대수 고무신 (1975)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계엄사령관, 추경호를 비롯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그 노래로부터 배운 게 없다. 이들도 이따금 그 노래들을 불렀을지 몰라도 이들의 삶은 노래 반대편에 서 있다. 노래를 틀어막는 편이다. 바로 독재의 편, 폭력의 편이다. 그곳에 서 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철면피의 편이다. 민주공화국이라는 가치가 지닌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편이다.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무지이다.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몽매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무지몽매한 자들을 끌어내려야 하는 숙제가 남겨졌다. 그것만이 아니다. 어쩌다 이런 반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는지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이런 이들이 다시는 권력을 잡게 되지 않을지 이야기 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을 퇴진시킨다고 깔끔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들이 반독재민주화운동 세력 중 일부가 참여한 정부의 집권 이후 계속 집권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질긴 생명력이 우리에게서 나왔을지 모른다는 자성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몰려드는 계엄군 앞에 맨몸으로 달려가 막아서는 시민이지만, 그들이 정권을 잡지 않으면 된다는 판단에만 사로잡혀 왔다. 이제 우리는 왜 이 같은 세력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는지 물어야 한다. 그들이 쿠데타를 통해 강제로 집권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의 질문이 더 정교해져야 할 이유다. 열광과 환멸을 반복하게 만든, 수십 년간 써온 대통령 중심제 방식이 여전히 유효한 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할 때다. 누가 정권을 잡는지만 따질 게 아니라 정권이 바뀌면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지 고심해야 한다. 한 길만 고집할 게 아니라, 이제는 “여러 갈래 길”을 두루 살펴도 좋지 않을까. 당분간 거리에 나가기 전에 이 질문들을 품고 나가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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