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꿈을 꾸고 그 꿈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 여성은 정신병을 가지게 되고 결국 죽게 된다. 채식주의자는 그 여성과 그 사람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챗GPT가 채식주의자를 이렇게 세 문장으로 요약했다. 아무런 해석 없는 요약이라면 상당히 간결하게 잘 요약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세 문장 줄거리다. 하지만 다양성 관점(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권력의 관점)으로 읽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줄거리 요약에서 나오는 한 단어 한 단어를 모두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일까?
영혜의 남편과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꿈을 꾸고 그 꿈에 의해서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 때문에 모든 게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다. 영혜의 꿈은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육식에 대한 불편감을 아예 느낄 수조차 없게 만들어져 있는 문화와 체제에 대한 이야기다.
“고기”를 “동물의 사체”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다. ‘너무 예민하다’, ‘사회생활 가능하냐’ 같은 이야기를 듣기 십상이다. 영혜는 어려서부터 고기와 생선 요리를 하는 엄마를 보았을 때 불편했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냥 괜찮은 척했다. 그리고 자신도 불판에 고기를 잘 굽고 생선 손질도 잘하는 사람이 됐다. 먹성도 좋았고 고기와 생선 요리도 잘하던 사람이 “갑자기” 채식을 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굉장히 이상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영혜의 몸과 마음에는 아주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왔던 일이 결국엔 드러난 것일 뿐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다.
나는 완벽히 채식을 하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람들이 ‘왜 채식을 지향하냐’고 물어보면 설명하기 힘들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게’ 설명하는 것이 힘들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내 건강 얘길 하는 것이다. 소화 기능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 말하면 ‘아, 그렇구나’하며 이해해 준다. 왜냐하면,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동물이 생명이라고 말하거나 환경이나 기후 위기가 어쩌고 그런 말을 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의 부정적인 피드백을 예상해야만 한다. 채식주의자에서 나오는 장면이 똑같이 일어난다.
이 사회 속에서 ‘아무 문제 없는 사람’, ‘정상적인 사람’, ‘효율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에 불편함을 끼치지 않아야 한다. 영혜가 채식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불편해했다. 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에 대한 불편함이다. 그리고 그 다른 행동 방식이 자신에게 죄책감을 주기(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자들(페미니스트)은 가부장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불편한 존재들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여성에게 부당하고 폭력적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강간이나 살인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나쁜 강력 범죄일 때만 사회가 반응한다. N번방, 박사방 사건이나 최근 있었던 딥페이크 사건처럼 전국적으로 아주 대대적으로 보도돼야만 반응한다. 사람들은 이런 사건들은 “갑작스럽다”고 느낀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절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회가 움직이는 모든 방식(법, 제도, 체제, 문화, 규칙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정, 인식, 기대와 같은 모든 것들)이 여성을 폭력적으로 대하고 있다. 여기서 ‘폭력적’이라 함은 육체적인 폭력과 성적인 폭력만을 말하지 않는다. 여성을 남성에 비해서 보조적이거나 부수적인 존재로 여겨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것, 성적 주체가 아니라 오로지 남성에게 성적인 대상이 되게 하는 것,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게 아니라 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겨지게 하는 등 사회구조와 문화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폭력이고 억압이라는 뜻이다.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 성범죄가 일어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폭력을 이 사회에 스며들어 있는 문화로서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일’이나 ‘극단적인 범죄’로만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이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과 태도 자체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구조까지 바꿔 내야만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둘째, ‘꿈’ 그리고 ‘미쳤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채식주의자에서 꿈은 중요하게 등장하는 요소다. 영혜의 꿈은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계기로서 등장한다. 영혜의 남편도 꿈을 꾸고 영혜의 언니 인혜도 꿈을 꾼다. 꿈에 반응하는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꿈을 꾼다. 나는 이 책에서 나오는 “꿈”이라는 것은 비유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꿈”은 꿈이든 경험이든 생각이든 사상이든 상관없다. 사회적 소수자가 자신의 생각이나 관점 혹은 사상을 이야기하면 ‘이상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경험은 ‘예외적인 경험’, ‘특수한 상황’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밤거리를 혼자 다닐 때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거나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고 이야기한다면, 남성들 중에는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아무 일도 안 일어나’와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그런 두려움을 평생 가져 본 적이 없다.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을 예민한 사람으로 치부한다.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성소수자도 동일한 경향을 갖는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경험은 그냥 그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이고 특수한 상황이고 그의 예민함 때문에 생긴 일인 것이지 정말 중요한 생각과 감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지만, 이 생각은 생각에 머물러 있을 때까지만 괜찮다. 입 밖으로 말하는 순간 ‘어처구니없다’,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마라’, ‘현실적이지 않다’와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이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을 하면 비난의 정도는 더 심해진다.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는 행동을 하는 장애인들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다. 성소수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도록 요구받는다. ‘성소수자도 인간이다. 평등하게 안전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를 말하고 실천하기 시작하면 욕을 먹는다. ‘지옥 간다’, ‘교회 가자’, ‘병원 가자’와 같은 말을 듣는다. ‘너네끼리 사는 건 괜찮은데 밖에 나오지 마라’, ‘퀴어문화축제 같은 건 하지 마라’는 말은 내 눈앞에 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불온하고 비정상적인 생각이나 모습은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의 고통과 억압의 경험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영혜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듣고자 하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했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보자. 영혜는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하고 실천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혜에게 “미쳤다”고 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말하거나 행동하면 안 된다고 요구받는다. 현실에서 페미니스트는 ‘미친년’, ‘꼴페미’와 같은 멸칭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 질문하는 사람, 변혁하고 개혁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으로 만드는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사회는 우리를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게 만든다. 그것을 “사회화”라고 한다. 보상과 처벌을 통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 우리를 적응시키고 순응시키는 과정이다. 이 사회의 “질서”를 잘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이 첫 번째 화자로 등장해 영혜를 설명하는 것이 첫 장면이다. 영혜의 남편은 영혜를 ‘아주 보통 사람’, ‘지극히 평범한 사람’, ‘아무것도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으로 설명하며 ‘그래서 내가 선택했다’고 말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사회 속에서 아무런 불편함을 끼치지 않는 존재가 돼야 한다. 자신의 모습에 사회적 질서와 맞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회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미친 사람’이 된다.
셋째, 죽음은 무슨 뜻일까?
채식주의자에서 쓰인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표면적으로 보면, 꿈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됐고 미치게 된 후에 결국엔 죽게 되는 영혜의 비참한 삶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장인 3장으로 배치된 인혜의 삶을 통해 죽음을 다시 해석하게 한다. 인혜의 삶은 영혜의 삶과 대비되는 모습으로 나왔고 이는 삶과 죽음을 억압과 해방으로 묘사하는데 쓰였다.
영혜의 삶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해방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의 죽음은 ‘해방을 위한 죽음’ 혹은 ‘죽음을 통한 해방’으로 읽혔다. 인혜의 삶은 그와 반대로, 생존하기 위해 폭력과 억압에 적응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인혜는 ‘견뎌왔다, 참았다, 인내했다, 용서했다, 받아들였다’와 같은 표현들이 많이 썼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삶, 삶이 없는 삶이었다. 마지막에 인혜는 ‘내가 한 번이라도 나의 삶을 살아 봤나’와 같은 질문을 한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혜가 죽어 갈 때, 인혜가 영혜에게 ‘어쩌면 이건 꿈인지 몰라.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깨어난다”는 표현이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과 폭력을 깨닫는 순간처럼 다가온다. 영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억압과 폭력의 세상에서 먼저 깨어나 저항하며 해방을 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혜는 영혜와 마찬가지의 그의 남편으로부터 ‘남편에게 아무런 불편함을 끼치지 않는 여자’로 소개된다. 억압과 폭력의 세상에 순응했고 잘 적응했기에 “성공적인 삶”을 살아내고 있었던 인혜는 억압을 강하게 내면화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엔 ‘우리가 이 폭력적인 꿈과 같은 세상에서 같이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자신이 내재화 한 자기 안의 가부장제를 인식하고 깨는 장면이다.마지막 장 거의 끝에 가면 영혜가 자신을 나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온다. 물구나무를 서서 자신은 광합성이면 충분하다며 채식조차 하지 않는다. 영혜는 이전에는 나무를 보면 뿌리가 땅에 박혀있고 가지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것처럼 생각했는데, 이제는 뿌리가 나무의 손이고 뿌리가 우리 세상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이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와 삶의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비장애인중심, 비성소수자중심, 선주민(자국민)중심 등 현재 우리가 “정상”이나 “표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기준”을 완전히 전복해 모두가 함께 안전하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영혜는 우리에게, ‘여성의 가슴이 나쁜 거야? 육식이 당연한 거야? 안 먹는 게 나쁜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죽는 게 나쁜 거야?’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에 질문하며 도전함으로써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에 대한 폭력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 사회의 동물에 대한 폭력의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계속 확대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를 장애인의 관점으로 볼 수 있고, 비성소수자 중심의 사회를 성소수자의 관점으로 볼 수 있고, 선주민(자국민)중심의 사회를 이주민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이번에 한강 작가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남긴 인터뷰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문학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어 가는 행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런 행위를 반복하면서 내적인 힘이 생기게 된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왔을 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최선을 다해서 결정을 하기 위해서 애쓰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문학은 언제나 여분의 것이 아니고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의 삶을 더 충만하고 생생하게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