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액 없이 감액만 반영된 내년도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주도로 통과됐다. 감액만 반영된 예산안이 본회의에서 처리되는 것은 처음이다. 전문가들은 감액된 부분이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논의가 완결되지 않은 예산안이 통과되면서 예산안에 정책 방향 등이 담기지 않아 시장에 불확실성을 줬다는 우려도 있다.
이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안에서도 즉각적인 추가경정예산 논의를 촉구하는 등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그러나 추경안 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문제가 빠르게 마무리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국회는 지난 10일 본회의에 2025년도 예산안을 재석 278명 가운데 찬성 183표, 반대 94표, 기권 1표로 의결했다. 통과된 예산안에 따르면 총수입은 정부안 651조8,000억원 중 3,000억원 감액됐으며, 총지출은 정부안 677조4,000억원 중 4조1,000억원 감액됐다.
통상 예산 심의는 각 국회 상임위의 감액·증액 의견을 종합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조정소위원회에서 감액을 반영한 뒤 감액된 재원 안에서 증액을 조정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부·여당과 야당 간 예산안을 두고 이견을 보였다. 야당은 예비비를 비롯해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의 특수활동비 등 사용처가 불분명한 예산을 대폭 삭감했으며, 이에 정부·여당은 민주당이 주장하는 2조원 규모의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 예산을 한푼도 배정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이에 야당의 주도로 감액만 반영된 예산안이 예결위를 통과해 본회의까지 상정됐다. 현행법상 국회가 예산에 대한 감액은 가능하지만 증액하거나 예산 항목을 신설하려면 정부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감액 예산안이 야당 주도로 처리될 상황에 처하자 윤 대통령은 이를 빌미 삼아 불법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어진 비상계엄 해제와 탄핵 국면으로 국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한때 정부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준예산' 편성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10일 여야가 막판 협상을 벌였으나 지역화폐 예산 규모를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결국 야당 주도로 감액 예산안이 통과됐다.
준예산은 예산이 법정 기간 안에 성립하지 못할 경우, 전년도 예산을 기준으로 집행하는 잠정 예산이다. 정부가 운영되기 위한 최소한 비용을 집행하는 것으로, 감액 예산안 통과로 최악의 상황은 피한 것으로 보인다.
통과된 예산안을 보면 총 286개 세부사업에서 총 4조1천억원이 감액됐다. 내년도 예산 규모 중 0.6% 수준이다. 이 중 예비비와 국고채이자상환 이상 두 개 사업의 감액 규모만 2조9천억원으로, 전체 감액 사업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구체적으로 정부 예비비를 정부 원안(4조8,000억원)에서 2조4,000억원 삭감했다. 국고채 이자 상환 예산은 5,000억원 감액했다. 또 국회 심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활동비를 대폭 삭감했다.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 특수활동비는 82억5,100만원, 검찰 특정업무경비 506억9,100만원, 검찰 특활비 80억900만원, 감사원 특경비45억원, 감사원 특활비 15억원, 경찰 특활비31억6000만원 등은 전액 삭감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했던 '대왕고래 프로젝트(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 예산은 정부안 505억원에서 497억원이 대폭 삭감됐으며, 용산공원 조성 사업 예산은 정부안 416억원에서 229억원이 감액됐다.
통과된 감액 예산안에서는 복지분야에서도 다소 감액이 반영됐다. 기초연금 지급 예산이 21조8,645억원에서 500억원 줄고, 돌봄수당도 5,134억원에서 384억원이 줄어 들었다. 이는 예측 기준을 좀 더 보수적으로 계산한 것이라는 게 민주당 측 입장이다.
국고채 이자상환 금액에 대한 삭감도 실제 지출액을 감액한 것이 아니라 내년 국채이자율 전망이 수정됨에 따라 실질적으로 지출되는 금액 추계를 달리한 것에 불과하다.
윤 대통령은 "청년 일자리 지원 사업, 취약계층 아동 자산 형성 지원 사업, 아이들 돌봄 수당까지 손을 댔다"며 야당의 감액 예산안을 비판했지만, 사실 정부안에서부터 복지예산은 대폭 삭감된 바 있다.
국회에 제출된 정부 예산안을 보면 임대주택지원 예산은 2조9,491억원으로 올해 예산 대비 2조원이나 삭감됐다. 일자리 지원 사업도 올해 845억원에서 절반 이상인 599억원을 줄였다. 영아수당은 올해 대비 1,979억원, 아동수당은 1,809억원 삭감해 국회에 제출했다.
전문가들은 감액된 부분으로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강병구 인하대 교수는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발표하면서 야당이 예산을 깎은 것을 이유로 들긴 했는데 그 정도로 크게 깎은 것도 아니다"면서 "결국 감축된 예산이 통과됐는데 내년에 추경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는 방식으로 확장 제정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말했다.
예결위원장인 박정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10일 본회의에서 예산안을 설명하면서 "좀 더 과학적인 예산이 추경을 통해 마련돼야 한다"고 추경 논의를 촉구하기도 했다.
추경의 경우 국회에서 먼저 논의한 뒤 정부의 동의를 받는 만큼 정규 예산보다 심의 절차가 정식예산보다 간소하다.
다만 일각에서는 야당 주도의 감액 예산안으로 앞으로 이어진 과도기 상황에 대처하기 부족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야당이 너무 성급하게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 같다"면서 "탄핵 후 내년 상반기에도 과도기적인 상황이 이어질 것 같은데 여러 가지 경제 상황에 대응하지 못할 가능성 큰 예산안"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추경 논의가 빠르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윤 대통령의 탄핵 표결이 먼저 정리되는 등 국회 안정이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빨리 탄핵을 해서 빨리 증액 추경을 해야 한다"면서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탄핵과 추경을 빨리 마무리해서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