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살다 이렇게 허접한 집권여당(탄핵이 됐으니 여당도 아니지만) 대표는 처음 봤다. 10여 일 동안 그렇게 왔다리갔다리 간보기를 하다가 궁지에 몰려 겨우 탄핵 찬성으로 입장을 선회했는데, 국민의힘 이탈표가 고작 12표? 그들 중 도저히 한동훈계로 볼 수 없는 안철수 의원을 제외하면 한동훈의 영향력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11표였다. 뭐 이런 허접한 당 대표가 다 있냐?
나도 잘 하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어서 누군가와 내기를 하면 이길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나조차도 한동훈하고 붙으면 웬만하면 다 이길 것 같다. 아무거나 골라서 한판 붙자. 고스톱, 멍 때리기, 라면 빨리 먹기, 벌레 잡기, 숨 오래 참기, 야바위, 옷 빨리 갈아입기, 높이뛰기, 멀리뛰기, 장대높이뛰기, 뒤로 뛰기, 널뛰기···. 뭘 골라도 내가 너는 이긴다.
아, 내가 도저히 못 이길 것 같은 분야가 하나 있기는 하다. 깐족거리기, 그건 한동훈 너님이 짱이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5일 국민의힘 비공개 의총에서 “사퇴하라”는 의원들의 요구에 한동훈이 “제가 비상계엄 했어요?” “제가 투표했냐고요?”라고 깐족댔다더라.
그래, 이건 내가 못 이기겠다. 선거를 맡기면 참패해, 당을 맡기면 콩가루가 돼, 당에 세력도 없어, 위기 상황에 결단력도 없어, 정치력도 없어, 하는 일도 없어, 없는 것투성인데 유일하게 있는 것이 깐족거리는 능력이다. 깐족 원툴 정치인, 한동훈이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캐릭터를 만들고 있다.
진정성의 중요성
사실 이번 12.3 내란 사태에서 한동훈은 살 길이 있었다. 진정성을 바탕으로 자기의 실력과 세력을 키우는 길이 그것이었다. 나는 한동훈이 하도 깐족거리고 다니기에 보수에서 영향력이 꽤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에서 드러났듯이 그의 힘은 고작 최대 11표를 좌우할 뿐이었다.
그러면 사람은 주제파악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현실을 깨닫고 실력부터 키워야 한다. 그래서 이번 12.3 내란 사태는 정치인 한동훈에게 어쩌면 큰 기회였다. 내란은 잘못 됐다, 윤석열은 즉각 탄핵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메시지만이라도 일관되게 내놓았다면 그는 11석따리 정치인에서 진짜 영향력을 가진 소신 있는 정치인으로 클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 하는 짓이냐? 대통령 직무를 정지시켜야 한다고 했다가, 1차 탄핵 소추에는 반대했다가, 한덕수하고 한-한 듀오로 소통령 짓도 노려보다가, 윤석열이 발끈하니 그제야 탄핵에 찬성한단다. 이걸 보고 국민들이 한동훈을 뭐라 생각하겠나?
최근 경영학 마케팅 분야에서 떠오른 중요한 화두는 ‘진정성’이다. 제임스 길모어(James H. Gilmore)와 조지프 파인 2세(Joseph Pine II) 등 두 경영학자가 ‘진정성의 힘 : 소비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간한 이후 두드러진 현상이다.
왜 진정성 마케팅이 중요한가? 소비자들의 트렌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길모어와 파인은 “더 이상 소비자들은 브랜드를 소비하지 않는다. 진정성을 소비한다”고 단언한다. 광고가 홍수를 이루면서 과장 광고가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아무리 광고를 그럴싸하게 해도 사람들은 5분 만에 그 제품의 진짜 품질을 파악한다.
그래서 길모어는 말한다. “소비자는 고품질과 적정한 가격, 즉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넘어 진짜 음식을 먹고, 진짜 이웃을 만나며, 진짜 차를 타고, 진짜 장소에 가서, 진짜 경험을 하기를 원한다”라고 말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필요한 정치적 기술은 단연 진정성이다. “나를 뽑으면 지역개발 왕창 해 줄게요”라는 허위 공약은 유권자에게 금방 들통이 난다. 유권자는 말을 그럴싸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나를 위하고, 진짜 절박하게 정치를 하며, 진짜 민중 속에서 몸을 부대끼는 진정성 있는 정치를 소비하려 한다.
진정성 마케팅의 사례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길모어와 파인은 “기업은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윤에 목숨을 건 기업에 진정성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자본의 관심은 오로지 물건 많이 팔아서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일 뿐이다.
다만 길모어와 파인은 “소비자들이 진정성에 큰 가치를 두기 때문에 기업이 진정성을 잘 연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물건 많이 팔고 싶으면 진실한 척 연기를 좀 잘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그들 중 진정으로 국민만을 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자라 하더라도 전자인 척 연기를 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잘 해야 한다. 소비자 혹은 유권자가 과장된 광고에 현혹되는 시대는 지났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표 선출 의원총회에서 인사말에 앞서 고개를 떨군 채 침묵하고 있다. 2024.12.12 ⓒ뉴스1
소비자는 진짜 음식을 먹고, 진짜 이웃을 만나며, 진짜 차를 타고, 진짜 장소에 가서, 진짜 경험을 하기를 원한다. 유권자는 진짜 내 이름을 불러주고, 진짜 내 고민을 들어주고, 진짜 내 불편함을 해소하려 해 주고, 진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정치인을 원한다.
한동훈은 이 기본적인 연기가 안 된다. 입만 열면 국민만 바라보겠다는데, 하는 짓을 보면 와리가리 간보기다. 이러면 진보나 중도는 당연하고, 보수도 한동훈을 외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진정성의 시대에, 무슨 선택을 해도 자기 이익만 챙길 것 같은 정치인에게 어떤 국민이 마음을 준단 말인가.
어찌됐건 한동훈이 막판 단 몇 표라도 움직여 탄핵을 가결시킨 것은 잘 했다. 보통 이런 일이 마무리되면 우리 마음에 고마움이 조금이라도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와리가리 한동훈에게 단 1그램도 고마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라도 뜻이 일치하긴 했는데, 함께해서 기분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이러다가 정치권에서 완전히 소멸되기를 기원한다. 잘 가라. 멀리 안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