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지역 한 교회에 걸린 ‘부정선거가 진짜 내란죄! 탄핵남발 민주당은 해산하라! 선관위 자백하라! 윤통최고! 화끈한 2차계엄 부탁해요’라는 내용의 현수막. ⓒ평화나무 기독교회복센타
윤석열이 지난 12일 대국민 담화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한 핵심 배경 중 하나로 극우 유튜버들이 줄곧 주장해온 부정선거론을 언급해 충격을 줬다. 이상한 건 친윤계를 포함해 여당인 국민의힘 주류들이 아무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수정 국민의힘 수원정 당협위원장은 SNS에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되더라도 선거관리위원회는 털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가 삭제하기도 했다.
극우 유튜버들의 부정선거론은 2020년 21대 총선과 2022년 재보궐선거, 올해 4월 총선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2022년 3월 대선만 예외다.
이 부정선거론은 사전투표와 본투표 결과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서 파생됐다. 사전투표와 본투표 득표율은 같아야 하는데, 사전투표에서 민주당이 더 많은 득표율을 얻기 때문에 그 차이 만큼 표가 조작됐다는 논리다. 이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오는 것들이 선관위 서버 해킹을 통한 실제 사전투표자 수 부풀리기와 개표기 조작 등이다.
부정선거론의 대전제는 ‘100만명 이상의 대규모 표본은 결국 같은 확률로 수렴된다’는 이른바 ‘큰 수의 법칙’이다. 사전투표든 본투표든 수백~수천만 규모이므로, 확률이 비슷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전제는 각각 사전투표와 본투표에 참여하는 인구집단과 투표성향 자체가 다르다는 점에서 이미 깨진다. 또한 개표 작업은 실물 투표지를 토대로 각 당과 후보 측 참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수검표로 이뤄지기 때문에 해킹이나 전산 조작으로 결과를 조작한다는 주장은 괴담 수준이다. 선관위는 윤석열이 담화를 한 날 입장문을 내 “기술적 가능성이 실제 부정선거로 이어지려면 다수의 내부 조력자가 조직적으로 가담해 시스템 관련 정보를 해커에게 제공하고, 위원회 보안관제시스템을 불능 상태로 만들어야 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작한 값에 맞춰 실물 투표지를 바꿔치기해야 하므로 사실상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반박했다. 윤석열이 담화에서 주장한 국정원 모의 실험에 대해서는 “보안 수준을 일부 낮춘 상황에서 모의 실험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석열은 12일 담화에서 그동안 과학적·사법적으로 증명된 모든 공적 근거들을 부정했다. 윤석열은 “작년 하반기 선관위를 비롯한 헌법기관들과 정부 기관에 대해 북한의 해킹 공격이 있었다”며 “선관위는 헌법기관임을 내세워 국가정보원의 시스템 점검을 완강히 거부했다”고 운을 띄었다. 이어 “상황은 심각했다.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방화벽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며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 시스템 보안 관리회사도 아주 작은 규모의 전문성이 매우 부족한 회사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 핵심인 선거를 관리하는 전산시스템이 이렇게 엉터리인데, 어떻게 국민들이 선거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며 “그래서 저는 이번에 국방장관에게 선관위 전산시스템을 점검하도록 지시한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뉴시스
윤석열은 왜 이렇게 됐을까. 전통적 보수 세력과 결이 다른 윤석열은 대선 때부터 극우 진영을 자신의 핵심 지지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종북세력 척결과 같은 극단적인 이념 편향적 구호를 아무렇지 않게 외치는가 하면, 외교·안보 영역에서 극단적인 반중·반북 주장을 내세웠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윤석열에게 주입된 것 중 하나가 극우파들의 부정선거론이다.
윤석열의 인식은 당시 윤석열 캠프 문건에서 확인된다. 신용한 전 윤석열 캠프 정책총괄지원실장이 언론에 공개한 2021년 12월 29일 ‘부정선거 관련 관리대책’ 문건을 보면 ‘양정철 개입설’ 항목에 ‘양정철은 민주연구원장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와 정책 교류 협약 체결→중국 개입설’이란 내용이 적혀 있다. 실제 윤석열 캠프에서는 9차례 부정선거 관련 회의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윤석열은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 유세에서 부정선거론을 꺼내들기도 했다. 그는 2022년 3월 4일 경주 봉황대 유세에서 “부정선거를 획책하는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살 수 없게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고, 이틀 후 경기도 의정부 유세에서도 “투표관리는 상당히 문제가 심각하다고 본다. 선관위가 썩으면 민주주의는 망한다. 지금 선관위가 정상이 맞냐”고 말했다.
이는 2020년 총선에 대한 부정선거론의 연장선이었다. 당시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자, 극우 유튜버들 사이에서는 ‘양정철이 중국 공산당과 빅데이터 시스템 관련 협약을 체결해 선거를 조작했다’는 설이 난무했다. 극우파들은 중국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 네트워크로 선관위 개표를 조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양정철은 빅데이터 사용과 관련한 혐의로 고발돼 경찰 수사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윤석열은 계엄 선포로 물리력을 동원해 부정선거론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뒤집고자 했다. 계엄에 따른 ‘체포조 명단’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과 조해주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김명수 전 대법원장, 중앙선관위원장을 지냈던 권순일 전 대법관이 포함됐다는 점은 윤석열 담화에서의 부정선거 단죄 시도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결국 윤석열이 그동안 부정선거론에 관해 과학적·사법적으로 증명된 모든 공적 근거들을 부정하고 있고,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위헌·불법적 계엄을 선포했는 데도 불구하고,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에 대해 명확히 선을 긋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극우파의 괴담을 그대로 답습한 윤석열의 주장은 일반 대중에는 충격적으로 다가온 반면, 극우파들에게는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부정선거론은 전광훈이나 황교안 전 총리 등 극우 개신교 세력을 등에 업은 일부 세력에게 종교적 신념 수준으로 수용돼 있고, 이들이 집회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 10만여 명에 달한다. 바로 이 점이 국민의힘 운신의 폭을 좁히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선거론은 곧 극우파를 강고한 지지 기반으로 삼는 국민의힘으로선 딜레마이자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괴담과 궤변을 신봉하는 극우파들 표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국 대중정당 지향성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윤상현 의원이 탄핵 표결 전후로 띄우고 있는 ‘비상계엄은 고도의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사법처리 대상이 아니다’는 주장이 버젓이 활개를 치거나, 탄핵안 표결에서 고작 12명만 찬성표를 던졌다는 점은 국민의힘이 처한 현실을 버젓이 보여준다.
국민의힘 서울 송파병 당협위원장이기도 한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7일 페이스북 글에서 “우리 국민의힘과 전광훈당이 같은 주장을 하는 꼴이 되어버렸다”며 “윤석열 대통령의 부정선거 망상이 계엄 선포의 근거가 되고, 85석 탄핵 반대가 그를 지키는 것이라면, 지금 국민의힘이 ‘전광훈당’과 다른 게 무엇인가”라고 탄식했다. 김 교수는 “이제 부정선거당, 전광훈당이 되고, 계엄대통령 옹호당을 자처해서 앞으로 어찌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이냐”며 “이제 곧 ‘현타’가 올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