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무장의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하라! 사무장은 1년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아니다” 2024년 세밑, 어떤 지역의 한 마을활동가가 SNS에 올린 일성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단 두 줄이었지만 문장 사이사이, 보이지 않게 꾹꾹 눌러 박은 속사정이 충분히 짐작되었다. 보조금 사업으로 진행되는 수많은 ‘마을 만들기’가 연례행사처럼 앓는 몸살이다. 한 해 두 해 일이 아니고, 겪을 때마다 사업 자체를 엎어버리고 싶을 만큼 모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차마 ‘마을’을 포기할 수 없어서 버티고 있는 활동가들이 많다. 마을활동가들의 불안정성은 마을공동체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다. 마을의 일은 결국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마을 만들기, 사람이 먼저다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토지, 노동, 화폐는 상품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자본주의가 토지, 노동, 화폐를 상품으로 만들고 개발지상주의에 몰입한 대가로 사람들간의 연결망은 단절되고 공동체는 해체됐다. 파멸적인 생태위기와 경제위기가 삶의 대안으로 ‘마을’을 소환했다. '마을'이라는 인간생활의 최소 단위를 생태적, 인간적으로 복원하고 풀뿌리 단위의 자립과 자치를 실현하는 문제가 긴요하고도 절박해졌다. 이로부터 ‘마을’이라는 이름을 단 사업들이 유행처럼 퍼져나갔고 중앙부처에서부터 지자체까지 사업이 쏟아졌다. 마을 만들기 사업이 ‘토건주의’와 닮았다는 비판도 있지만, 도시건 농촌이건 자연발생적인 마을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현실에서 마을의 복원은 민관이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사람’과 ‘노동’은 공동체를 이루는 필수요소다. ‘관계망’을 구축한다는 것은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의 결과물이다. 마을활동가들은 마을의 의제를 주민들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설득하고 조직하고 연결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마을 만들기 전 과정에 마을활동가의 노동이 스며들지 않은 것이 없다. 이들의 노동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합당한 대우는 없는 일종의 ‘그림자 노동’이다. 활동가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존중, 합리적이고 적당한 보상체계 마련은 마을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다. 마을의 사무장을 1년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취급하는 노동 환경이라면 마을공동체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마을은 소비되고 있고 사람들은 지쳐서 현장을 떠나고 있다”는 마을활동가들의 자조 섞인 우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마을활동가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마을은 어떻게 달라질까? 마을활동가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되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행정이 요구하는 실적 내기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주민들과 함께 더 신명 나고 재미있게 마을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마을축제의 한 장면, 벼룩시장(자료사진) ⓒ이하나 제공
‘사회적 자본’ 축적에 기여하는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비단 마을활동가들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민이 주도하고 참여하는 지속 가능한 마을 만들기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마을공동체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 필수이다. 주민들이 공론장에서 만나 교류하면서 호혜하고 연대하며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나갈 때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고 공동체는 성장한다. 이때의 ‘공론장’은 주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완전히 열린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 불안정 노동과 빈곤의 확산, 노동시장의 양극화로 인해 먹고 살기 힘겨운 다수의 대중은 의도치 않게 참여가 제한되고 공론장으로부터 배제되기도 한다. 시간이 부족해 마을 일에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마을 문제 해결의 당사자인 주민의 공동체 진입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니, 애당초 노동과 마을은 떼어놓고 사고할 수 없다. 만약 기본소득을 지급하여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삶을 보장할 수 있다면, 공동체의 관계망이 강화되고 마을이 살아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20세기 전후 사회의 총체적인 복원을 위해 기획된 ‘복지국가’는 완전고용과 사회보험을 활용한 빈곤의 퇴치를 목표로 삼았다. 그로부터 1백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인류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고령화, 기계화(자동화), 노동의 변화, 빈곤의 확산, 불평등(소득 양극화) 심화 등은 복지국가 탄생 초기에는 고려하지 못했던 문제들이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부의 양극화는 더 심해졌고, 소득이 적고 가난할수록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복잡하게 설계된 복지제도도 안전망이 되어주지 못했다. 노동시장에서 배제당하고 국가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외롭게 자살을 선택했던 '송파 세 모녀의 비극'(2014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고용의 불안정성→소득의 불안정성→사회적 보호의 불안정성'이라는 연쇄구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렵다.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복원은 요원하다. 마을활동가 몇 명의 헌신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 ‘잠정적 유토피아’로 가는 길
학교 무상급식 문제로 '보편적이냐 선별적이냐'를 놓고 온 나라가 논쟁을 벌였던 것이 불과 10여 년 전 일이다. 우여곡절을 뚫고 무상급식은 시행되었고 고등학교까지 전면 무상급식하는 시대가 코 앞에 왔다. 기본소득도 마찬가지다. 전혀 불가능하고 허황된 상상이 아니다. 이미 핀란드, 스위스, 미국, 인도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구체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회장도 “기본소득은 필수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지금 여기’에서 실현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꿨다. 이를 ‘잠정적 유토피아’라고 했다. 20세기 초 세계 자본주의의 변방 국가에 불과했던 스웨덴은 사람들이 가장 절실해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국난을 극복하며 보편적 복지국가로 발돋움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실현 가능한 잠정적 유토피아는 기본소득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노동, 소득, 복지, 사회의 구조적 전환 없이 마을공동체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 내란사태가 종식되면 조기 대선이다. 어떤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어떤 정치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한국사회 총체적인 위기를 딛고 새로운 국가 비전을 만들어가는데 기본소득이 핵심 논제가 되기를 바란다. 다시, 정치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