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Gregory Elich 칼럼] 대한민국을 군사독재의 길로 끌고가려 한 윤석열의 계획

한 미국 진보학자가 바라본 계엄 사태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 선포를 시도하다 실패한 이후, 언론과 조사기관이 밝히내는 내용은 점점 더 충격적인 전모를 보여주고 있다. 윤 대통령와 공모자가 작성한 계획에는 충격적인 수준의 잔혹성과 대규모 억압이 있었고, 심지어 계엄을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과의 무력 충돌을 유발하려고도 했다. 많은 서방 언론은 계엄 철회를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도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극우 세력은 윤 대통령의 탄핵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확정할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계엄령의 배경

계엄령 선포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윤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성향은 이미 오래전부터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비판 세력을 ‘반국가 세력’으로 매도하며, 자신의 극우 정책에 대한 반대를 반역으로 간주하곤 했다.

이런 태도는 특히 2023년 광복절 연설에서 절정을 이뤘다. 윤 대통령은 진보적 야당과 진보 활동가들을 ‘공산 전체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반국가 세력으로, 허위 선전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시키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윤 대통령의 이분법적 관점에서는 그의 극우 정책에 반대하는 한국 사회의 상당수는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 세력으로 보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망상적 발언을 이어갔다. “공산 전체주의 세력은 항상 자기를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적 활동가로 위장하며 비열하고 비윤리적인 전술과 허위 선전을 펼쳐왔다. 우리는 이런 세력에 절대 굴복해서는 안 된다.”

윤 대통령의 억압적인 성향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 적도 많았다. 2023년 5월 31일 경찰이 한 노조 집회를 강제 진압했고 며칠 뒤에는 건설노조 본부를 수색해 전자기기와 문서를 압수했다. 또 약 1년 전에는 국가정보원과 1,000명 이상의 폭동 진압 경찰을 동원해 민주노총 본부 및 다른 14곳의 노조 사무실과 주택을 급습했다. 이는 일부 노조 관계자들이 북한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가짜 혐의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당시 3명의 노조원이 체포돼 수년 형을 선고받았다. 국가정보원은 과거부터 증거를 조작해 활동가를 억압해 왔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0년 전 통합진보당의 강제 해산을 초래한 허위 증거 조작 사건이었다.

정치 단체도 탄압 받았다. 지난해 8월 경찰은 민중민주당 사무실과 회원들의 자택을 급습했고 코리아연대의 두 지도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국가보안법은 오랜 세월 정부에 대한 이견과 비판을 억누르는 무기로 사용돼 왔다.

윤 대통령은 그의 반노동 정책에 대응하여 고조되는 노동계의 불만에 직면해왔다. 그의 대응은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조직적 견제로 특징지어지는 강압적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윤 대통령이 군부 장악을 시도하게 된 주된 동기 중 하나도 노동조합 운동에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특히 민주노총에 대해 유독 강한 적의를 표출하며 자주 격분했다. 지난 8월 대통령 관저에서 윤 대통령은 비상조치를 논의하며 민주노총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4월 10일 총선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집착했다. 야당의 압승으로 끝난 총선은 윤 대통령과 그의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셜 미디어는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제기한 근거 없는 선거 부정 의혹으로 넘쳐났다. 윤 대통령이 자신을 돌아보며 총선 패배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이런 부정선거 주장을 더 받아들일 만한 설명으로 여겼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윤 대통령은 그의 망상을 부추기고 분노를 자극하는 극우 유튜버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이는 군부 장악을 계획하게 된 또 다른 주요 요인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문을 열고 '비상계엄'을 선포한 3일 밤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2024.12.3 ⓒ뉴스1


군사 독재로의 회귀를 획책한 윤 대통령

계엄령 계획은 4월 총선 훨씬 전부터 오랫동안 준비돼 왔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만 봐도 군사 쿠데타 모의가 2023년 12월 윤 대통령이 군 관계자들에게 ‘어려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비상조치’라는 말을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4년 6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진 ‘5자 회의’에서는 계엄령 발동을 위한 세부 시나리오가 수립됐다. 이 회의에는 윤 대통령과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이진우 장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당시 대통령 경호처장이었다가 이후 국방 장관이 된 김용현, 그리고 국방정보본부장 여인형이 참석했다. 이들은 최소 10차례 만난 후 11월에 계엄령 시뮬레이션을 실시했다.

처음에는 윤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군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대통령은 계엄령에 대해 항상 확고한 입장을 보여왔다’고 하나, 김용현은 초기에는 그다지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2024년 3월경에는 김용현이 ‘계엄령의 강력한 지지자가 된 반면, 국가정보원장 조태용과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신원식이 일관되게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

같은 달 어느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정치적 좌절감에 격분한 윤 대통령은 "곧 계엄령을 선포해야 할 것"이라고 불쑥 말했다. 충격을 받은 신원식과 조태용은 윤 대통령을 만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감정이 고조된 가운데 저녁 식사 후 김용현과 여 모 씨는 신원식의 자택을 찾았고, 그곳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충돌했다. 신원식은 계엄령에 강하게 반대했고, 그와 김용현은 곧 격렬한 언쟁에 휘말려 밤늦게까지 서로를 향해 고성을 지르며 대립했다.

매파로 알려졌음에도 윤 대통령의 헌정 질서 전복에 동조하지 않는 신원식에 대해서는 조치가 필요했다. 계엄령에 대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인물은 곤란했다. 8월 12일, 윤 대통령은 보다 협조적인 김용현을 새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했고, 이는 9월에 발효됐다. 이 중요한 자리에는 계엄령을 확고히 믿는 사람이 필요했고 김용현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윤 대통령은 김용현을 임명하면서 신원식을 방해가 되지 않을 다른 자리로 밀어냈다.

9월에는 계획이 진전되어 본부정보분견대(HID) 소속 정예요원들이 계엄령 하에서의 작전 수행을 위한 훈련을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HID는 전시에 북한에 침투하여 고위 관료를 암살하고 파괴 공작을 수행하는 임무를 가진 특수부대이다. 윤 대통령이 이러한 특수 기술을 국내 민간인을 상대로 이용해도 된다고 여겼다는 것은 민주적 반대 세력에 대한 윤 대통령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의 판교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11월이 되자 국군기무사령부는 계엄령에 대한 고위급 계획을 수립했다. 윤 대통령의 계엄 모반의 설계자로 널리 알려진 정보사령관 노상원이 시행 계획을 입안했다. 노상원은 정보 분야 경험 외에도 불미스러운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6년 전 그는 성폭행 혐의로 18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불명예 전역했다. 민간인 신분이었음에도 노상원은 정보 분야 경험과 김용현 국방부 장관과의 오랜 친분 덕분에 핵심 협력자가 됐다.

11월 중순, 노상원은 국군정보사령부장 문상호 소장에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급습 계획을 지원할 비밀 작전에 능숙한 15명의 명단을 요청했다. 문 소장은 ‘대북 작전에 매우 능숙하고 어학 능력을 갖춘’ 요원을 이 임무에 선발했다.

계엄령 선포일이 다가오면서 계획은 더욱 구체화됐다. 2월 1일, 노상원은 롯데리아에서 문 소장과 두 명의 정보사령부 대령들을 만나 계엄령 지원 작전 계획을 논의했다. 민간인이었음에도 노상원이 지시를 내렸다. 노상원은 다른 이들에게 "선거 부정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관위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민간인이 군 지휘 계통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노상원과 김용현 국방부 장관의 긴밀한 관계는 잘 알려져 있었다. 노상원은 이를 이용해 두 대령에게 협조하면 승진 기회를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김용현 장관이 문 소장에게 미리 내린 지시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노상원의 지시가 나의 지시임을 알려라.“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기 몇 시간 전, 롯데리아에서 두 번째 회동이 있었다. 이번에는 제2기갑여단장 구삼회가 참석자들과 합류했다. 노상원의 지시에 따라 구 여단장은 이후 경기도의 한 정보사령부 지휘소로 이동해 대기 중이던 HID 요원들과 합류했다. 구 여단장의 역할은 그의 여단이 서울과 가장 가까운 기갑부대라는 점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구체적인 지시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같은 날 김용현 국방부 장관이 "국회가 국방예산을 가지고 장난치니 탱크로 밀어버리자"고 발언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모자들이 계엄령에 대한 대규모 시위가 있을 것을 예상했고, 탱크로 대응하려 했다는 의심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계엄 선포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5분경, 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발표된 계엄령 포고령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모든 정치 활동, 파업, 시위를 금지하고 군사 통치를 부정하거나 전복하려는 행위를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언론은 계엄령 사령부의 통제하에 놓였다. 이를 위반할 경우 체포, 구금, 영장 없는 수색,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포고령은 과거 계엄령 하에서 대규모 억압, 투옥, 고문, 처형을 경험했던 한국 사회에 깊은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헌법은 계엄령 요건으로 ‘군사적 필요’ 또는 ‘국가 비상사태’를 규정하고 있으나 이번 경우는 어느 조건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폭력을 통해 합법성을 대체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한 추산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반란을 위해 최소 4,200명의 폭동 진압 경찰과 1,700명 이상의 군인을 동원했다. 다른 추산에서는 이를 합해 총 4,749명으로 보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헌법상 계엄령을 철회할 권한이 있는 국회를 주요 타겟으로 삼았다. 국회가 정족수를 채워 투표를 진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계엄령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뉴스가 방송되자 격분한 국민 수천 명이 국회로 달려가 군대와 대치하며 도착하는 국회의원들이 군사 봉쇄를 뚫고 건물에 들어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맞섰다. 국회 안에서는 사람들이 출입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창문으로 진입한 군인들을 소화기로 저지했다.

국회에 배치된 군인 중 다수는 출동 전 국경 지역으로 보내진다고 들었으며 유서를 작성하고 채혈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헬리콥터로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복잡한 비행 경로를 의도적으로 사용해 목적지를 알 수 없도록 했지만 군인들은 자기가 속았음을 즉시 깨달았다. 일부는 국회의원들을 건물 밖으로 끌어내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한 군인은 “우리 부대는 단 230명인데 어떻게 그들을 끌어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지휘관은 “끌어낸다는 것은 총기나 특수 기술로 그들을 제압하고 끌어낸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의 동기는 전략적이면서도 개인적이었다. 그는 특히 혐오했던 몇몇을 겨냥하며 국가정보원 차장에게 민주당 대표 이재명, 국회의장 우원식, 그리고 여당 대표 한동훈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이번 기회에 모두 체포하고 정리하며, 국가정보원에 대공 수사권을 부여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대공 체포팀에는 이 세 사람을 최우선으로 체포해 수갑과 족쇄를 사용해 수원 구치소로 이송하라는 추가 지시를 내렸다. 계엄령의 개인화는 방첩사령부 체포팀의 사무실 화이트보드에 우선 체포 대상 14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국회 봉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조짐이 보이자 다급해진 윤 대통령이 바쁘게 움직였다. 윤 대통령은 계엄군에게 저항을 진압하라는 긴급 전화를 계속 걸었고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에게 암호화된 전화로 “아직 정족수가 못 모인 것 같은데 뭐하고 있어! 문을 부수고 들어가 사람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같은 요청이 특수전사령부 김현태 대령에게도 전달됐는데, 윤 대통령은 “본회의장에 150명 이상의 의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국방부 장관 김용현에게도 비슷한 지시를 내리며 “정족수가 채워지기 전에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했고, 곽 사령관에게 계엄군이 공포탄과 테이저건을 사용해 진입할 것을 촉구했다 곽 사령관의 압박에 현장 지휘관들은 대통령의 명령에 대핸 논의하며 국회 전력을 차단하는 것도 고려했다. 하지만 많은 지휘관이 그 명령의 적법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다. .

윤 대통령은 수도방위사령부 이진우 사령관에게도 연락해 “사람 네 명이라도 한 명씩 끌어낼 수 없느냐?”고 요청했다. 그는 곧 다시 전화를 걸어 “아직 안 들어갔나? 총으로 문을 부수고 끌어내라”고 재촉했다. 그는 또한 경찰청장 조지호에게 밤새 여섯 차례 전화해 “국회에 들어가려는 모든 의원을 체포하라. 그들은 모두 계엄령을 위반하고 있다”고 명령했다.

한편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자마자 국방정보사령부 소속 군인 10명이 과천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본부로 진입했다. 약 두 시간 후 군인 110명이 건물을 에워쌌고 추가로 130명이 수원에 있는 선거교육원 인근에 배치됐다. 계엄군은 서버 연결을 비롯한 여러 세부 사항을 촬영하며 서버를 계엄령 통제 시설로 옮기기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그러나 국회 투표가 이를 저지하며 시간이 부족해졌다.

정성우 방첩 1처장은 방첩국장 여인형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군사보안실장, 사이버보안실장, 과학수사실장과 만났다. 그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검찰과 국가정보원이 올 것이다. 중요한 업무는 검찰에 맡기고 우리는 이후 지원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는 대검찰청이나 내부 고위 관계자들이 계엄령 음모에 공모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윤 대통령의 두 번째 계엄 시도

2024년 12월 4일 오전 1시 1분, 정족수를 확보한 190명의 국회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만장일치로 윤 대통령의 계엄령을 철회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국 계엄법에는 국회가 계엄령 철회를 의결한 경우 대통령은 즉시 이를 발표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헌법을 따르지 않고 3시간 반 동안 국민 앞에서 침묵했다.

윤 대통령은 국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계엄령을 강행하려 했다. 국회 투표 직후 윤 대통령은 수도방위사령관 이진우에게 전화를 걸어 “190명이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설령 계엄령이 철회되더라도, 내가 두 번, 세 번이라도 다시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다. 그러니 계속 진행하라”고 했다.

계엄령사령부는 투표 직후 2시간 동안 대법원 행정처에 반복적으로 연락해 군사 사령부로 사무관을 보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는 군이 사법부를 직접 통제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대법원은 계엄령의 정당성을 의심하며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국회 투표 30분 후 윤 대통령은 합동참모본부 내 계엄 상황실에서 군 장성들과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버스로 이동한 34명의 장성과 고위 간부가 윤 대통령 관저에 도착했지만 회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계엄령 철회 직후 계엄령사령부가 전북 제7공수여단과 충북 제13공수여단에 대기 명령을 내리고 서울로 진격해 서울에 배치된 병력을 지원할 준비를 지시한 것이 알려졌다. 전남에 주둔한 제11공수사단 역시 방탄복, 헬멧, 화기를 지급받고 차량 엔진을 가동한 상태로 즉각 출동할 준비를 했다.

윤 대통령은 또한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통해 장관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윤 대통령은 오전 4시 30분경 방송에 출연해 계엄령 철회를 발표하고 이후 공수부대에도 대기 해제를 명령했다. 계엄령 철회 결정이 지연된 구체적인 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원래 계획된 계엄 초기 단계

계엄령사령부는 여러 시설을 준비해 수감자를 수용할 계획이었다. 그중 하나는 서울과 과천 경계에 위치한 수도방위사령부의 B1 벙커로 최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또 다른 시설은 서울에 위치한 심리전 건물이었는데 국회에서 가까운 이곳에서 고도로 훈련된 특수 HID 요원들이 고위 수감자들을 심문할 예정이었다. 일반 시민은 표준 교도소로 이송될 계획이었다.

12월 4일 오전 1시 1분 국회가 계엄령을 철회를 결정하자 전국 교도소에 수용 가능 인원을 보고하라는 요청이 전달됐다. 이런 요청은 보통 교도소 직원의 정규 근무 시간에만 이루어진다. 그 시점에서 요청이 이뤄졌다는 것은 윤 대통령이 국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즉각적인 대규모 구금을 계획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윤 대통령이 성공했다면 군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그 컴퓨터 서버를 장악했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은 내부 소식통으로부터 정보 요원과 HID 요원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본부를 급습해 ‘부서장과 30명의 주요 직원들을 제압하고, 케이블 타이로 손목과 발목을 묶고, 얼굴을 가린 뒤 B1 벙커로 이송할 계획’이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은 계엄군에 납치된 후 투욕보다 더 가혹한 운명을 맞을 예정이었다. 심문 과정에서 피구금자들로부터 원하는 답변을 얻어내기 위해 송곳, 니퍼, 망치, 금속 야구 방망이 등 특수 도구가 준비됐다. 이런 도구가 가할 수 있는 고통을 상상하기란 너무나 쉽다.

특히 노상원처럼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12월 1일 롯데리아 회동에서 그는 중앙선관위 위원장을 직접 심문하겠다고 말했다. 노상원은 "야구 방망이를 내 사무실로 가져오라"고 지시하면서, ‘제대로 말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 부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노상원은 또한 선관위 웹사이트 관리자를 강압해 선관위 홈페이지에 "선거 부정 자백문"을 게시하려 했다. 계엄령 선포 2주여 전, 노상원은 체포된 선거 관리 공무원들에게 사용될 심문 방식에 대해 더욱 노골적으로 언급했다. "부정 선거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잡아서 박살내면, 선거 중에 있었던 모든 부정이 드러날 것이다."

윤 대통령의 계엄령이 실패한 후 경찰은 계엄령의 중심인물인 노상원의 자택을 급습했다. 경찰은 노상원이 작성한 회의 기록이 담긴 수첩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수집 및 구금 대상”으로 정치인, 언론인, 노조원, 종교인, 판사, 공무원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수첩에 ‘총살 처형’도 언급돼 있었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은 우선 체포 대상을 친히 관리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국회의장 우원식을 체포 대상으로 삼았다. 계엄령 철회 투표 40분 후 여러 명의 병사와 사복경찰이 우원식의 자택에 도착해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우원식은 대다수 국회의원들과 마찬가지로 국회 본회의장에서 밤을 지내며 언제 재개될지 모를 윤 대통령의 추가 공격에 대비했다. 3시간을 잠복한 사복경찰이 돌아간 것은 윤 대통령이 계엄 해를 선포한 3시간 후였다. 우원식은 그렇게 체포를 피했다.

쿠데타 은폐 시도

계엄령 취소 이후 은폐 작업이 즉시 시작됐다. 국회에서의 대치 상황 이후 병영으로 복귀한 군인의 휴대전화가 압수됐고, 외출이 금지됐다. 이 명령은 윤 대통령이 탄핵된 지 3일 후인 12월 17일까지 철회되지 않았다.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고 군인들이 수사관들 앞에 증인으로 나서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지휘관들만이 이 명령에서 제외됐다. 수도방위사령부와 특수부대의 하급 병력들도 비슷한 제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은 "증거 인멸과 진실 은폐 시도가 도처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반란의 배후인 윤석열이 체포, 구금되지 않는 한 반란 가담자들의 증거 인멸 시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계엄령이 종료된 후 여러 공모자가 윤 대통령의 관저에 모여 대국민 해명을 조율했다. 이후 모든 참가자들은 흔적을 감추려는 듯 휴대전화를 교체했다. 윤 대통령은 경호처에 지시해 경찰의 자택 수색을 막고 수사기관의 소환을 반복적으로 무시하는 등 지연 전술을 거듭 사용했다.

이 반란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광범위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9월 4일, 민주당 양문석 의원은 130명의 장성들이 짧은 기간 동안 한국의 정보 사이트인 나무위키에서 정보를 삭제하거나 삭제하기 시작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9월 기자회견에서 양 의원은 이것이 예고하는 바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윤석열 정부와 군이 전쟁이나 대규모 군사 배치를 목적으로 한 계엄령과 같은 비상사태를 준비하고 있다는 강한 의혹이 든다."

그 우려는 결국 적중했고, 만약 대량 삭제와 실제로 연관이 있다면, 수사관들은 아직 군사 및 정치 체제의 핵심에 있는 부패의 전모를 밝혀내지 못한 것이다. 정보를 삭제한 첫 번째 인물은 계엄령 음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국군기무사령관 여인형이었다.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다른 이들도 삭제를 했지만, 나머지 인물들과의 연관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장성들의 동기는 다른 공모자들과의 연관성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개 정보를 제거하는 것이었을 수 있다. 12월 19일 국회운영위원회에서 양 의원은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을 다시 제기하며 수사를 촉구했고, 장성들이 "나무위키에서 자신들의 정보를 삭제한 것은 반란의 숨은 협력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군사 독재 정당화는 군사적 충돌로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를 앞두고 윤 대통령은 국회가 뒤집을 수 없는 군사 통치의 법적 틀을 마련하려 했다. 북한과의 갈등을 만들어내서 ‘군사적 필요성’을 내세워 누구도 계엄령을 막을 수 없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놀랍게도 공모자들은 한반도를 전면전으로 몰아넣지 않을 만큼만 북한을 자극할 계획을 검토했다. 그 정도의 ‘정밀 조율’을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의 반응은 그들만의 계산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 외부에서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착각이다. 이 과정에서 희생될 한국 국민의 목숨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갈등을 유발하려는 노력 중 하나로 윤 대통령은 2024년 10월 드론으로 평양에 선전물을 살포했다. 민주당 조사관들에게 제출된 보고서에 따르면 이 작전을 주도한 대통령 직속인 국가안보실은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를 우회하여 드론사령부에 국경을 넘는 드론 발사를 명령했다. 선전물 제작과 드론 장착은 군이 주도했다. 이와 동시에 북한의 반응을 유도하려는 희망 속에 합참은 ‘드론 침투 시 적절히 대응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뜬금없고 모호한 발표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고 남한 군은 과도한 보복의 명분을 얻지 못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더 확실한 접근법이 필요했다. 노상원의 수첩에는 더욱 위험한 아이디어가 기록돼 있다. 서해북방한계선(NLL)은 북한의 참여 없이 그려진 경계선으로 북한이 민감하게 여기는 지역이다. 갈등을 유발하고자 한다면 이 지역이 유력한 장소였다. 노상원의 수첩에는 “NLL 인근에서 북한의 공격을 유도”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24년 6월 3일 윤 대통령은 2018년 9월 19일 북한과 체결했던 서해상 ‘실사격 및 해상 기동 훈련 중단’ 합의를 무효화했다. 같은 달 연평도와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는 약 300발의 로켓, 미사일, 포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북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국 군은 9월과 11월에 추가 대규모 사격 훈련을 진행했다. 한 한국 군 관계자는 “이 정도면 북한 군의 반응을 촉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반응도 없었고 도발 징후도 없었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북한의 군사적 대응을 유발을 위해서 우익 단체들이 수십 년 동안 북한에 풍선을 보내 선전물을 살포해 온 관행이 검토 됐다. 북한은 엄청난 시간과 자원을 들여 남측 선전물을 치워야 했다. 북한은 오랫동안 이 관행에 대해 항의했지만 대부분 무시당했다. 2024년 5월, 결국 북한은 남한이 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몇 달 동안 북한은 쓰레기와 폐기물을 담은 풍선을 국경 너머로 보내며 남한 역시 이를 치우는 데 많은 비용을 쓰게 했다.

계엄령 계획자들은 이를 이용할 기회를 엿보았다. 북한이 간접적인 시도에 반응하지 않자 더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노상원과 국방부 장관 김용현은 북한의 풍선 발사 지역을 공격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두 사람은 북한이 대응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으며 이후 남한이 평양을 공격하면 전면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노상원조차도 이 계획에 주저했고 김 장관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래도 김 장관은 ‘북풍 작전’이라는 이름의 포격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지휘 체계를 정비했다. 그리고 계엄령 선포 5일 전 합참의장 김명수에게 북한의 풍선 발사 지역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재앙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전쟁 행위였다. 다행히 김명수 의장은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앞서 국방정보본부는 영화 제작을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8월에 민간 회사에게 북한군 군복 170벌을 제작하게 했다. 12월 첫 주에 배달될 예정이었던 이 군복은 실제 북한군 군복을 모델로 삼아 제작됐다. 그러나 이 군복이 납품된 것은 12월 6일로 이미 계엄령이 무너진 뒤였다.

한미관계

미국 입장에서 보면 윤석열 대통령은 꿈의 파트너였다. 그는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반중(反中) 삼자 군사 동맹에서 하위 파트너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대통령이었다. 워싱턴이 계엄령에 대해 우려를 표했더라도 그것은 오직 계엄령 실패가 여전히 미국 군사주의에 순응은 하지만 덜 열정적인 파트너가 들어설 위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과거 계엄령 당시의 한국이나 피노체트의 칠레, 수하르토의 인도네시아와 같은 군사 독재 정권은 미국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동안 미국이 진정으로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한국이 어떤 상황에서도 중국과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미국을 계속 지원할지 여부다. 한국 국민의 자유가 희생되더라도 괜찮다. 한국 내부 상황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어느 쪽도 자극하지 않으려는 애매모호한 논평뿐이다.

바이든 정부는 한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주의를 계속 지지해야 한다는 기대를 강조하는 데 예전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 편이이었다. 미국은 서울로 전달한 수많은 성명과 미 국무부 부장관 커트 캠벨 등의 방문 등으로 이를 끊임없이 한국에 각인시켰다.

법원이 12·3 비상계엄 선포 사태 관련 내란 우두머리(수괴)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재발부한 가운데 8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에서 관계자들이 근무를 서고 있다. 출입구는 철조망과 쇠사슬 등으로 봉쇄돼 있다. 2025.1.8 ⓒ뉴스1

장기적인 군사 독재

현재까지 한국의 조사는 계엄령 발효 직전과 그 기간 동안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질문에도 답이 필요하다. 반란 세력의 장기적인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몇 달, 몇 년에 걸쳐 군사 통치를 어떻게 하려고 구상했을까?

아직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많지 않다. 그러나 2024년 12월 3일 윤 대통령이 국회를 ‘범죄자의 소굴’이라고 비난한 연설에서 그의 장기적인 목표를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진보주의자, 노조원, 활동가, 그리고 민주당 당원과 지지자 대부분을 포함한 ‘친북 반국가 세력’을 ‘즉각 제거’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광범위한 계층이 위험에 처했음을 암시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윤 대통령이 ‘제거’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 단어가 암시하는 폭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계엄령사령부가 대규모 수감자를 수용할 준비를 했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수감’이 곧 ‘제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윤 대통령은 더 영구적인 것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이미 폭력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음을 보여줬다. 최소한 고위급 수감자 일부를 처형하고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를 고문할 계획이었다는 것도 알려졌다. 많은 일반 국민 역시 비슷하게 ‘제거’됐을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계엄령 하의 한국 사회는 대규모 억압과 공포 속에 놓일 운명이었다.

윤 대통령은 장기적인 군사 통치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 계엄령 발표 몇 시간 전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입법기구를 위한 예비 기금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이 국회를 대체할 기구를 만들어 군사 통치를 단기간이 아닌 수년간 유지하려 한 것이다.

미래 전망

조사를 받아야 하는 윤 대통령의 반항적인 태도는 탄핵 절차의 진전을 방해하며 증거를 체계적으로 파기할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법적 절차를 방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당 내 극단주의 세력과 지지자를 선동하며 권력 유지를 위한 조사 거부를 정당화하고 있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심지어 폭력적인 계엄 조치를 옹호하며 윤 대통령의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신년사에서 윤 대통령은 한국이 ‘반국가 단체’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며 민주주의 회복과 법치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겨냥했다. 윤 대통령은 “당신들과 함께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덧붙이며 극단주의자에게 동원 신호를 보내기까지 했다.

윤 대통령은 직무에서 배제됐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몇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만약 재판소가 윤 대통령의 탄핵을 기각한다면 그는 대통령으로서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성공시키기 위해 더 많은 폭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교훈만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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