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현 반공청년단 단장과 단원들이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반공청년단 출범 기자회견을 한 뒤 취재진 질의에 답하고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하얀 헬멧을 쓰고 관저 사수 시위를 벌인 이들은 "백골단은 반공청년단의 예하 조직"이라며 "윤 대통령을 지키고 대한민국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5.1.9 ⓒ뉴스1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1980~1990년대 시위대를 폭력을 동원해 체포하던 경찰 사복체포조인 ‘백골단’을 자처한 극우 성향의 청년들이 하얀 헬멧을 쓰고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 주선으로 단상에 오른 이들은 자신들을 ‘반공청년단’이라 소개했고, 예하 조직으로 ‘백골단’이란 자경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백골단’이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의 폭력 정치를 상징하는 이름이라면, ‘반공청년단’은 이승만 시절의 극우폭력 정치를 상징하는 이름 가운데 하나다.
해방 직후 ‘빨갱이 사냥’에 나선 서북청년단 2014년 등장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
우리 사회에 극우폭력 정치가 부활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본격적으로 나온 건 지난 2014년이었다. 그해 9월 28일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라는 단체가 광화문에서 세월호 참사 추모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제거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서북청년단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악명’ 높은 이름이다. 공식명칭은 ‘서북청년회’지만 대중들은 이들을 ‘서북청년단’이라 불렀다. 서북청년회는 해방공간에서 좌익세력 등을 대상으로 암살과 테러를 자행했고, 특히 제주4.3항쟁에 토벌군으로 참여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이란 보수연합단체 회원들이 지난 2016년 12월 17일 헌법재판소 인근 안국역 5번 출구 앞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서 '서북청년단'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서북청년단 재권위 회원이 행진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모습. ⓒ민중의소리
이들은 2014년 11월 28일 서울 중구 을지로3가 서울청소년수련관에서 회원 50여 명이 모여 재건총회를 열고 서북청년단의 부활을 알렸다. 당시 수련관에서 내부 규정을 이유로 행사를 불허했지만, 직원들에게 막말과 멱살잡이까지 벌이며 총회를 강행했다. 이들은 이날 과거 서북청년회 중앙집행위원 출신의 손 진(당시 95세, 2017년 사망)을 회장으로 선출하며 해방공간에서 악명을 떨친 서북청년단과 자신의 연관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들은 이후 각종 극우집회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지난 2023년엔 75주년 제주4.3 추념식이 열리던 제주4.3평화공원 앞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서북청년회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절규하듯 항의했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북청년회는 영락교회 청년회가 중심이 돼 만들어진 조직이다. 영락교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초대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개신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한경직 목사가 1945년 세운 교회다. 한 목사는 북한 신의주 지역에서 활동하다 해방 이후 소련군이 진주하자 남으로 내려와 영락교회를 세웠다. 당시 영락교회엔 북한 서북지역(황해도 평안남북도) 사람들이 대거 집결했고, 이북 출신의 반공주의 개신교 청년들은 영락교회 청년회를 통해 서북청년회를 조직했다.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북청년단 단원들. ⓒ기타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말 출범해 이승만이 1948년 12월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이라는 어용단체를 꾸릴 때까지 2년 정도 활동했다. 기간을 짧았지만, 폭행과 암살을 전국 각지에서 벌이는 등 테러를 자행했다. 이른바 ‘빨갱이 사냥’에 나선 것이다. 좌익세력은 물론,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에게 좌익과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학살했다. 1948년에 일어난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이들도 서북청년회였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서북청년회 종로지부 총무부장 출신이다. 이들은 좌익을 편들었다는 이유로 현직검사를 암살했고, 기업가의 요구를 받고 노동조합 파괴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공산주의라는 괴물과 싸우겠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서북청년단은 제주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서북청년회는 정치깡패였지만, 자신들의 테러가 하나님을 위한 성전이라 믿었다. 한경직 목사는 1947년에 한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설교에서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이 유럽을 횡행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입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목사는 공산주의를 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 괴물과 싸울 것을 설교를 통해 독려한다. 이듬해 제주 4.3항쟁 진압에 서북청년단이 참여한 것도 바로 이런 독려가 바탕이 된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괴물과 싸우겠다는 서북청년단은 제주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지난 2003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서북청년회는 4.3사건 발발 전부터 도민들과 갈등을 빚어 사건 발생의 한 원인으로까지 지목받아왔는데, 이승만과 미군은 강경작전을 앞두고 서북청년회를 아예 군경에 편입시켰다. 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대량 주민 희생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북청년회 위주로 경찰이 재편됐고, 군대에는 ‘서청중대’가 따로 편성됐다”며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 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밝히고 있다.
서북청년회의 악몽은 한국전쟁 과정에서도 되풀이됐다. 1950년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 정권은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했다. 희생자 대다수는 이승만 정권이 좌익세력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반공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영문도 모른 채 가입한 이들이다. 이들을 각 지역에서 모아 이른바 사상 전환 교육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부역하거나 동조할 수 있다면서 예비검속해 학살했다. 군과 경찰은 물론 서북청년회와 같은 각종 반공 청년 단체들도 학살에 직접 가담했다. 그렇게 전국에서 죽어간 민간인이 수십만 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는 항일독립운동가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의 정치깡패 전위대 반공청년단이 2025년 다시 등장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은 극우 성향의 반공 청년들을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1959년 만들어진 ‘대한반공청년단’이다. 반공청년단은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의 자유당 선거 승리를 위해 나선 정치깡패 집단이다. 지난 9일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준 반공청년단은 이런 이승만의 청년전위대 이름을 빌어와 내란수괴인 윤석열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청년단의 만행을 되짚어보면 2025년 다시 살아난 반공청년단의 위험성을 잘 알 수 있다.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이 반공청년단 총재였고,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부총재, 신도환이 단장을 맡았다. 반공청년단엔 여러 주먹조직이 가입했고, 임화수 등 유명한 정치깡패들이 반공청년단에서 활동했다.
1960년 광화문 세종로 반공회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대한반공청년단 ⓒ국가기록원
이승만은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인 자신에게만 연임 규정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면서 장기 집권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1956년 3대 대선에서 관권과 금권을 동원해 선거를 치렀음에도 무소속 조봉암 후보가 득표율 30.01%를 기록하며 이승만을 긴장시켰다. 심지어 부통령 선거에선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이 44.03%에 그치며 46.43%를 기록한 민주당 장면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반공청년단의 테러로 1960년 3.15 부정선거 과정에 김주열 열사 등 수많은 이들이 사망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선 야권 대선후보인 조병옥이 미국에서 서거하며 이승만이 대통령선거에 단독후보로 나서면서 사실상 당선을 확정했지만, 이기붕의 당선을 염려한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 사활을 걸었다. 고령인 이승만의 유고를 대비해야 했던 만큼 중요한 선거였다. 지난 선거에서 장면에게 패배했던 이기붕의 당선은 어려웠고, 관권과 금권에 더해 정치깡패 조직인 반공청년단까지 만들어 선거를 치렀다. 이 선거가 바로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이끈 3.15 부정선거다.
반공청년단은 단원들을 동원해 야당인 민주당 간부와 당원들을 공격했다. 심지어 이들의 테러로 민주당 간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당시 관련 희생자가 수십 명이 넘었다. 그리고 반공청년단의 이런 정치폭력은 결국 자유당 정권을 몰락을 부른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열사 시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마산 시민들은 분노했고, 그러한 저항의 물결은 전국으로 퍼지면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기타
1960년 선거 당일 마산 시내에선 1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부정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물론 반공청년단원들이 학생과 시민들을 몽둥이로 무차별 폭행했다. 분노한 마산 시민들이 결집하면서 항쟁이 벌어졌다. 시위대를 향해 경찰과 반공청년단 등의 폭력이 이어졌고,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한 중학생이 실종됐다. 전북 남원에서 올라온 어머니는 아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4월 11일 마산 부두에서 아들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눈에 최루탄이 박혀있는 처참한 모습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고, 그가 김주열 열사다.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민들은 분노했고, 제2차 항쟁이 일어났다. 마산 시내 모든 관공서와 파출소, 어용 언론이던 서울신문사, 자유당사 등이 불탔다. 이날의 시위는 전국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전위대인 반공청년단을 향한 분노도 커졌다. 당시 반공청년단의 본거지는 광화문 세종로에 있던 반공회관이었다. 서울에선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시민들이 경무대(현 청와대)로 행진했고, 경찰의 발포로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공회관이 불을 질렀다. 결국, 이승만의 몰락과 함께 반공청년단은 해체됐다.
전두환 정권의 전위대였던 사복체포조 ‘백골단’ 하얀 헬멧에 청바지·청자켓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시위대 폭력 진압 강경대 열사 등 백골단에 의해 사망
폭력적인 지난 정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반공청년단이란 이름이 여당 국회의원을 통해 국회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의 예하 조직이라는 ‘백골단’은 군사정권의 폭력을 떠올리게 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향한 비판이 커지자 ‘백골단’이라는 이름을 재고하겠다고 밝혔지만,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백골단은 원래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의 외각조직 가운데 하나였다. 백골단은 반공청년단과 마찬가지로 관제 시위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벌인 정치깡패 집단이다. 백골단은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지만,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이승만의 백골단처럼 외각조직이 아니라, 하얀 헬멧에 청바지·청자켓을 입고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던 경찰 사복기동대(사복체포조)의 별칭이었다.
1980년대 중반 탄생한 백골단은 전두환 정권의 전위대였다. 무술 특채 경찰관 등이 주를 이뤘던 백골단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공포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전투경찰이 방패와 방석모 등으로 무장한 채 시위대를 막는 역할이었다면 가벼운 복장의 백골단은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며 시위대 체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다쳤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89년 4월 고려대에서 열린 전민련 3차 국민대회 중 백골단에 연행되는 참가자 ⓒ고 박용수 선생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91년 강경대 열사와 김귀정 열사 사망 사건이다. 지난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이후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의 불길이 거세졌고, 그해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은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폭력 진압으로 질식사했다.
박창수 열사 안치된 영안실 벽 뚫고 시신 탈취까지
그해 백골단은 반인륜적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대우조선 노조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 수감돼 있던 1991년 5월 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이틀 뒤 사망했다. 그는 수감 기간 안기부에 의해 여러 번 고문을 당했고, 그가 사망하기 전에 의문의 남성들이 병실을 찾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조와 시민사회에선 고문치사 의혹을 제기했다.
경찰은 사건을 덮기 위해 그해 5월 7일 박창수 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안양병원에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했다. 쏟아지는 최루탄과 함께 백골단은 영안실 벽을 부수고, 박창수 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했다. 이후 강제로 부검한 뒤 박창수 위원장이 18m 높이의 병실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발표하며 사건을 덮어 버렸다.
윤석열 내란과 함께 부활한 과거의 극우단체 우려스럽다
이런 폭력 때문에 백골단은 처음 만들어진 1980년대 중반부터 시민들의 폐지를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경찰도 이런 여론에 부담을 느껴 여러 차례 폐지를 검토했다. 백골단 폭력 사건이 연이어 터진 1991년엔 노태우 정부가 백골단 폐지를 선언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복기동대는 복장과 편제가 바뀌며 더는 ‘백골단’이라 불리진 않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다 지금은 사라졌다.
윤석열의 시대착오적 비상계엄은 과거 극우폭력 단체의 이름을 우리 사회에 다시 등장시켰다. 국민의힘은 소속 의원들은 그들과 함께 관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그들을 국회에 세우기까지 했다. 이승만과 전두환이 ‘서북청년단’과 ‘반공청년단’, ‘백골단’을 동원해 벌인 극우폭력 정치가 윤석열 내란과 함께 다시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