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상홍의 원전 없는 나라] 사고관리계획서를 불태워라

“제주항공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참으로 외람된 말이지만 제주항공 참사를 접하고 핵발전소 사고가 오버랩 되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희생자들을 앞에 두고 딴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시간이 조금 흘렀으니, 그때의 불경한 생각을 짧게 옮겨도 되지 싶다.

항공기 안전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아무래도 이착륙 순간이다. 그런 만큼 이착륙의 핵심 기기인 랜딩기어는 이중 삼중의 안전 기준으로 설계되고 제작되었을 것이다. 평소 꼼꼼하게 정비하여 필요한 순간에 정확히 작동하도록 준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랜딩기어가 작동하지 않아 육중한 비행기 몸체가 엄청난 마찰을 일으키며 지면에 동체 착륙하는 영상을 생생히 볼 수밖에 없었다.

생사의 초비상에서 기장은 재빨리 판단했을 것이다. 동체 훼손이 적은 곳, 콘크리트 활주로를 벗어나 비포장 들판으로 기수를 틀었으리라. 또한 그곳은 경사진 흙더미가 있어서 제동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하지만 경사진 흙더미는 폭발과 함께 수직 콘크리트 장벽으로 밝혀졌다. 한순간 179명이 허망하게 사라지기 전까지 흙더미 안에 수직 콘크리트 장벽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으리라. 공항 도면 어딘가에 표시되어 있어도 사람의 기억에는 없었을 것이고, 더구나 안전 문제를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참사는 이렇듯 우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새떼 충돌로 비행에 이상이 생기고, 랜딩기어는 작동하지 않고, 믿었던 흙더미는 콘크리트 장벽으로 밝혀지는 불행의 연속.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이 상호 복합되어 ‘안전 매뉴얼’은 휴지 조각이 된다. 어느 순간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매뉴얼은 작동하려 해도 그것을 떠받치는 시스템이 붕괴되어 비극적 대형 사고를 촉발한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가 8일 오전 전남 영광군 한빛원자력발전소 앞에서 "부실자재를 사용한 한빛원전 3, 4호기 가동 중단"을 촉구하며 십자가 160개를 설치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

핵발전소 사고도 항공기 참사와 다르지 않다. 이중 삼중의 안전 개념으로 설계하고 수없이 기기를 점검하고 근무자의 자질을 높여 사고 확률을 0에 가깝게 낮추지만 결국 참사는 발생한다. 그래서 도입된 제도가 핵발전소의 방사선환경영향평가에 ‘중대사고’를 꼭 반영하도록 한 것이다. 중대사고는 비행기로 치면 제주항공 참사에 해당한다.

다행히 대한민국의 핵발전소는 중대사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중대사고가 발생해도 다량의 방사능이 시민들을 공격하는 위험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항공기 사고에 비유하면 비행기가 추락해도 사망자는 없다. 왜냐하면 한수원이 ‘사고관리계획서’에 따라 방사능이 외부로 다량 방출하지 않도록 잘 관리하기 때문이다.

한수원의 사고관리계획서는 일종의 가상 세계다. 가상 세계에서는 모든 조건이 통제되고 어떠한 극한 상황도 잘 관리되어 안전하게 착륙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전혀 다르다. 현실에서 가상 세계는 쉽게 붕괴하고 사고관리계획서가 휴지 조각이 되는 순간, 불시착이 시작된다. 후쿠시마와 같은 중대사고로 이어진다.

한수원이 제공하는 가상 세계를 벗어나는 데서 안전은 시작된다. 국가(원자력안전위원회)의 핵발전소 안전 규제는 매우 엄격해야 함에도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사고관리계획서로 중대사고를 평가하고 있다. 핵발전소 주민들이 “원자력안전법에 따른 중대사고 평가를 하지 않았다.”고 성토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는 고발한다. “방사능이 다량 방출되지 않는 중대사고는 중대사고가 아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한수원의 사고관리계획서를 불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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