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갑의 수요뮤직] 2025년의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를 부를 때마다 함께 했던 무수한 사건과 현장은 노래를 더욱 사무치게 했다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성 집회’에서 깃발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다. 2025.01.25. ⓒ뉴시스

지난 1월 25일 토요일 오후 4시 서울 경복궁역 4번 출구 쪽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8차 범시민 대행진’은 깃발 행진으로 시작했다. 그동안 집회에 수많은 단체와 개인 깃발을 들고 나온 이들이 집회의 즐거움을 배가시켰는데, 이들의 존재와 수고를 주목하게 하는 공식적인 프로그램이 없어서 마련한 순서였다. 수많은 깃발이 끝도 없이 밀려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집회의 대표적인 스펙타클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깃발 입장을 시작할 때 맨 처음 흘러나온 음악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그 다음에 이어진 곡은 ‘다시 만난 세계’와 ‘그대에게’였다. 전통적인 민중가요 대표곡에 이어 새로운 민중가요 대표곡이 연달아 이어진 셈이었다. 노래가 흐르고 깃발이 출렁이는 순간은 눈물이 벅차오를 만큼 감동적이었다. 감동은 나부끼는 깃발의 강렬한 존재감에서 왔고 노래로부터 왔다. 누구라도 그 순간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다시 만난 세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올해로 44년이 된 노래다. 만들어진 지 44년이나 된 곡을 듣고 부르면서 감동받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물론 ‘아침이슬’은 그보다 오래되었다. 더 오래된 노래를 듣거나 합창하는 일이 드물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세대가 참여한 집회에서 수 십 년째 같은 노래를 듣고 부른다는 사실은 특이하고 특별하다.

지난 2013년 5월 18일 오전 서울광장에서 열린 '5.18민주화항쟁 제33주년 서울기념식'에서 한 시민이 전시된 임을 위한 행진곡 원본 악보 앞을 지나고 있다. ⓒ민중의소

이제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1년 광주민중항쟁을 담은 음악극 ‘넋풀이 굿(빛의 결혼식)’을 만들며 창작한 곡이다. 백기완의 ‘묏비나리’ 중 일부분을 소설가 황석영이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가사를 썼고, 대학가요제에서 수상한 광주의 청년음악인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당시 광주의 문화예술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사례인데, 음악극은 황석영의 집에서 카세트테이프로 몰래 녹음했다. 엄혹한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는 숨죽인 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유튜브가 없는 시대였고, 제대로 된 녹음실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원본 카세트 테이프를 하나 더 복사해서 두 사람이 하나씩 품에 품고 서울로 옮긴 다음 비밀리에 배포했는데, 노래는 금세 퍼져나갔다.

노래의 힘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드문 단조 행진곡은 학살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이들의 마음을 처절하게 대변했다. 광주민중항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 가운데 누구도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라는 가사를 울지 않고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래는 슬픔과 패배감으로 주저앉지 않는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에서부터 힘을 모은 노래는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으로 폭발한 다음,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로 영원히 내달린다. 동지와 나누었던 뜨거운 맹세를 떠올리게 하고, 그 기억을 역사에 대한 낙관으로 확장한 다음, 깨어나 외치는 역동성을 분출하는 노래는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고 두 번이나 명령한다. 출렁이는 역사의 격동을 품은 듯 장엄한 노래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진군한다. 한국예술사에 이보다 뜨거운 진격 나팔은 없다.

이 노래는 광주민중항쟁의 충격으로 좌절한 이들에게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다. 백기완의 말처럼 혁명이 늪에 빠졌을 때 예술이 앞장 선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않겠다고, 산자로서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노래는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었다. 1982년부터 노래를 부를 때마다 함께 했던 무수한 사건과 현장은 노래를 더욱 사무치게 했다. 노래에는 더 많은 사연들이 담기면서 노래가 꿈틀대게 만들었다. 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 일은 노래처럼 살겠다고 약속하는 일이었으며, 투쟁과 저항의 역사를 연결해 써내려가는 일이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 임을 위한 행진곡

1980년대 언젠가부터 운동권들이 집회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며 민중의례를 하는 이유는 이 노래의 메시지 때문이었고, 완성도 때문이었으며, 노래에 쌓은 피땀눈물 때문이었다. 이 노래는 운동의 역사를 이어간 주역이고 현대사를 바꾼 주인공이며 살아있는 현장교육이었다. 그러므로 2009년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5·18 공식 기념식 때 이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 한 것은 노래에 깃든 역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발버둥이었다. 들끓는 변혁의 의지를 거세하려는 억압이었다. 하지만 노래는 예술가의 손끝에서 카세트테이프로 옮겨진 뒤 민중의 가슴에서 타오르며 화인처럼 새겨졌다. 불길은 나라 밖으로도 번져갔다. 홍콩, 미얀마, 태국 등지의 운동과정에서도 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노래는 국경을 넘어 시대를 넘어 새로운 투쟁을 열어가고 있다.

케이팝의 리듬에 맞춰 응원봉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대,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광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이유는 단지 그 노래가 익숙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운동의 역사를 대표하는 곡이라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장에 모인 이들이 운동의 역사를 존중하고 계승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순간은 5·18 이후 이어진 저항의 연속이며, 그 이전의 장구한 투쟁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며, 그 역사 속에 함께 하겠다는 집단적인 다짐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노래를 통해 만나고 연결되며 노래와 함께 나아간다. 같은 노래도 누가 언제 부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페미니스트, 청소년, 성소수자가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는 광장의 확장이다. 존중과 연대다. 계속 그래왔듯 노래와 함께 역사가 바뀔 것이다. 이런 노래라면 훗날 헌법을 바꿀 때 국가國歌까지 바꾸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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