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지학의 세상다양] 극단의 시대, 서로를 느낄 수 있다면

장원영과 이희준의 ‘서로 배움’ 가능성에서 발견하는 사회갈등 해결

좀처럼 예능을 잘 보지 않는 나는 얼마 전 짝꿍과 함께 "냉장고를 부탁해(냉부)"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아이브 장원영님과 희극인 이은지님이 게스트로 나온 날이었다. 게스트들과 요리사들 그리고 MC들의 케미와 호흡이 정말 좋았다. 어쩌나 재미있던지 '예능 프로그램 좀 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나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 즉 취향이라는 게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서 탐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받을 수 있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은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받아왔기 때문이다.

냉부팀에서 가져온 장원영님의 냉장고에는 나는 들어보지도 못한 재료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재료들에 대한 장원영님의 취향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음식이나 조미료들 사이 서로의 조합에 대해서도 자신의 취향이 확실했고 이는 '감동적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장원영님은 부유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다고 들었다. 분명히 그 영향이 있겠지만 이는 "경제력" 때문만은 아니다. 부잣집에서 자랐어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추측건대 장원영님의 양육자는 분명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하는 분이었을 것이고 자신의 자녀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했을 가능성이 높다.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한 장원영님 ⓒ방송 캡처

장원영님의 취향 표현에 대해 여러 번 연거푸 감동을 표현하는 나에게 짝꿍은 다른 냉부 에피소드에 출연한 배우 이희준님의 경험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이희준님은 연극인으로 살던 시절 고시원에 살며 하루를 라면 하나로 버티곤 했다고 한다. 사발면 하나로 아침에는 면만 먹고 남은 국물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저녁에 돌아와서 밥을 말아 먹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희준님이 출연한 에피소드를 찾아서 보았다. 이희준님은 요리사들의 음식을 먹으며 '맛을 모르고 살았던 자신이 안타깝게 느껴진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서로가 서로의 생각, 감정, 경험을 들음으로써 배우고 성장하게 하는 다양성훈련을 진행하는 퍼실리테이터로 살고 있다. "직업병(?)"때문일까, 나는 우리 사회가 장원영님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과 이희준님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공감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내가 만약 장원영님과 이희준님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둘이 연예인으로 살면서 공통적으로 하게 되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먼저 한 뒤, 이어서 경제력, 나이, 성별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차례대로 진행해 보고 싶다.

장원영님은 탈덕수용소라는 유튜버가 퍼뜨린 열애설, 왕따설, 불화설 등 각종 가짜뉴스와 루머로 인해 고생했다. 이러한 사이버 폭력은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폭력이자 범죄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젊은(어린) 여성은 더 높은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도 마찬가지다.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젊은(어린) 여성이 더 높은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범죄의 대상이 될 확률도 높고 대상이 되었을 때 타격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하다.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지고 유통된 딥페이크 성범죄 영상 중 50% 이상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K팝계에 종사하는 여성 아이돌의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10대에 데뷔하여 이제 스무살이 된 장원영님과 40대 중반 남성인 이희준님의 경험에는 성별과 나이로 인해 다른 점이 많을 것이다. 일상에서든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든 어디에서나 말이다. 40대 남성은 20대 여성인 사람과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며 산다. 같은 선주민, 비장애인, 비성소수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40대 남성인 나는 출근길에 성추행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늦은 밤에 길을 혼자 걷더라도 성폭행을 당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디지털 성범죄를 당할까봐 공중화장실 사용을 망설여 본 적이 없다. 이것을 남성이 성별에 의해서 가지고 있는 사회적 특권(Social Privilege)이라고 한다. 남성의 성별 특권은 여전히 채용, 승진, 임금 등에도 작용하고 있다. 내가 아무 이유 없이 누리는 특권은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겪게 되는 사회적 억압(Social Oppression)과 연결되어 있다.

나보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현재도 나보다 부유한 20대 여성이 있다면 그는 경제력을 이유로 나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고 있을 수 있다. 이는 '20대'라는 정체성이나 '여성'이라는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력'에 의해 주어지는 특권이다. 반면 그는 성별에 의해 경험해야 하는 억압도 경험하게 된다. 성별에 의해서는 억압그룹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별에 의해 주어지는 특권인 남성 특권은 나에게 있다.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한 이희준님 ⓒ방송 캡처


장원영님과 이희준님, 두 분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두 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수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정체성들은 특권그룹에 속하고 또 다른 정체성들에서는 억압그룹이나 경계그룹에 속한다. 나이와 같은 정체성은 누구나 어린이, 청소년으로 억압그룹에 속했다가 청년으로 경계그룹에 속하기도 하고 40~60대가 되면 특권그룹이 된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노인이 되어 다시 억압그룹에 속하게 된다. 노인이 되면 누구나 다양한 질병과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며 질병과 장애 정체성에서도 억압그룹에 속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점점 더 극단화하는 한국사회
서로를 느끼고 대화하고 이해하는 교육과 훈련 절실

 
넷플릭스 시리즈 '센스8'에 특권에 대한 개념이 잘 드러나는 대화가 등장한다. DJ 라일리가 비행기를 타고 영국 런던에서 아이슬란드로 아빠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이로비에서 HIV에 감염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카페우스와 나눈 대화다. 카페우스가 라일리에게 '구름 위를 비행기로 날 수 있다니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난 한 번도 비행기 못 타봤어'라고 말하니, 라일리가 '이건 운이 아니야. 특권이야'라고 말한다. "럭키비키"라는 별칭을 얻은 장원영님은 '오히려 좋아', '원영적 사고'와 같은 표현을 유행시키며 긍정적 사고의 아이콘이 됐다. 나는 장원영님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좋아한다. 동시에 '오히려 좋아'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늘 함께 생각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때문에 일상적으로 고정관념, 선입견, 낙인, 편견, 배제, 차별, 폭력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회구조적 억압에 '오히려 좋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운(Luck, Fortune)과 함께 특권과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센스8에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여덟 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클러스터(Cluster, 무리)로 묶여 있어 서로가 서로의 감각을 느낀다고 설정하고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잘 연결될 수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인데도 서로를 도울 수 있다. 누군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이 나에게 느껴지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로 그를 도울 수 있다. 인종, 민족, 종교,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가족의 형태, 가족사, 직업, 경제력 등과 상관없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나는 우리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듣고 느끼며 서로의 고통과 기쁨에 공감한다. 그 깊은 연결을 키스와 성관계로 묘사하기도 한다. 나는 이와 비슷한 쾌감을 깊은 대화를 통해 느낀다.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안전한 공간에서 나누는 대화만큼 짜릿한 일이 없다. 다양성훈련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 나는 십여 년 전에 미국에서 일주일 간 진행되는 청소년 다양성훈련 캠프를 경험하고 인생이 180도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평생 만나본 적 없었던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트랜스남성/트랜스여성/젠더퀴어/논바이너리, 게이/레즈비언/바이/범성애자/무성애자, 중동국가 출신의 무슬림 남성과 여성 청소년들, ADHD/아스퍼거 증후군/우울/불안/공황/섭식장애 등 다양한 정신질환을 가진 청소년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함께 모여 대화하는 사람들이 가진 가족의 형태와 경제력도 모두 달랐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함께 대화 나누며 나의 세상이 확장됐다. 내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험을 알게 됨으로써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알게 됐다. 내가 나를 대하는 자세, 타인을 대하는 태도,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모두 변했다. 다양성훈련의 진행자(퍼실리테이터)들은 자신들의 관점과 지식을 일방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직면 활동을 만들어서 진행하고 그 활동 중에 관찰한 것들과 느낀 감정 그리고 떠오르는 경험들을 나눌 수 있도록 대화를 진행했다. 나는 그 과정 중에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다른 참여자들에게 배우기도 했다. 강요나 설득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교육의 힘을 믿는다. 내가 교육을 통해 변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양성훈련이 인생의 터닝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교육은 내용도 중요하고 방식도 중요하다. 일방적인 방식의 교육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내가 강력하게 경험한 반억압/사회정의 운동으로서의 다양성훈련을 한국사회에 전하고 싶어 2015년에 한국다양성연구소를 만들고 지난 10년 동안 다양성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다양성연구소가 진행하는 다양성훈련은 인종, 민족, 종교,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가족의 형태, 장애, 질병, 지역, 외모, 나이, 고용의 형태, 경제력(소득), 학력/학벌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정체성과 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사회적 특권과 억압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배울 수 있도록 한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대화해도 공격받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환경에서 서로의 경험 그리고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눔으로써 서로에게 배우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즐겁고 귀한 경험이 된다. 나는 공교육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길 바란다. 공교육 밖 수많은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청소년들과 비청소년들 모두에게 이런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점점 더 극단적으로 양분화되었다. 정치인, 종교인, 언론, 미디어, 커뮤니티 운영자들 등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과장이나 왜곡도 서슴지 않으며 제공하는 정보의 사실 여부조차 중요하지 않다. 정치이념과 종교적 신념으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한다. 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어적, 육체적 폭력도 불사한다. 자신이 공격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누군가가 알려준 정보만을 맹신하여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가장 슬프다.

안전한 환경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반대해도 된다는 것을 알고 서로 배움을 위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극단적으로 양분화된 한국사회 현실에서 이러한 상호성과 교차성을 함께하는 작업은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가 마음과 귀를 열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듣고 서로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모두에게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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