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주 52시간’ 규제 완화, 실용이 아니라 퇴행이다

반도체 업계 연구·개발 노동자에게 주 52시간 노동 상한 적용을 제외하는 내용을 담은 ‘반도체특별법’의 국회 통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민의힘이 발의한 이 법안에 민주당은 애초 부정적 입장이었으나, 지난 23일 이재명 대표가 탈이념·탈진영, 실용주의를 선언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3일 민주당이 주최한 정책 토론회에서 이 대표는 “특정 산업의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냐 하니 할 말이 없더라”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총노동시간을 유지하면 된다’고 하지만 특정 시기 몰아서 일하는 방식은 집권 초기 윤석열 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한 ‘주 69시간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이 대표가 ‘탁상공론 정치가 국민의 삶을 위협한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반도체 산업의 신상품·신기술 연구개발 노동자가 회사와 서면 합의하면 주 52시간 규제 등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이 법안의 쟁점인데, 현장의 노동자들은 이전부터 강한 우려를 표했다. 전국삼성전자노조가 904명의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연구·개발 직군 노동자 90%가 근로시간의 길고 짧음이 반도체 산업 경쟁력 확보와는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법안에 반대했다. 실제로 작년 한 해 15차례에 걸쳐 23만 시간 이상 특별연장근로를 실시한 삼성전자보다 단 한 건의 특별연장근로도 실시하지 않았던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이 더 높기도 했다. 노동시간 규제가 반도체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재계의 진단은 틀렸을 뿐 아니라 위기의 원인을 노동 규제로 돌려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반도체특별법의 노동시간 예외 논의는 장시간 노동을 유발하고 노동자의 휴식권을 보장하지 않는 퇴행적 정책일 뿐이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기는 노동시간이 적어서가 아니라 급변하는 업계 상황에서 경영전략이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장시간 노동으로 경쟁력을 회복하겠다는 낡은 발상은 안일하다. 오히려, 혁신을 막고 임금 경쟁력에 기반한 수출주도 경제 시스템을 고집하는 후진적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우수 인재의 유출 우려도 크다.

연구·개발 직군의 주 52시간 규제 완화 논의는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와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다른 산업 영역의 규제도 허물 수 있다는 시그널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장시간 노동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2023년 OECD 회원국 평균 노동시간(1752시간)보다 122시간 더 일하는 것으로 발표됐다. 실용을 이유로 섣불리 주 52시간 규제 완화에 나서는 것은 노동자의 건강권과 휴식권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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