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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또 미뤄진 상법 개정, 정치권은 반성해야

상법 개정안 통과가 미뤄졌다. ‘이사회는 총주주의 이익에 충실해야 한다’는 상식을 명문화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일인가.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은 국회의장 벽에 막혔다. 당초 27일 본회의에서 상법 개정 통과가 점쳐졌으나, 결국 상정되지 않았다. 우원식 의장은 “여야 간 이견이 큰 만큼 협의가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여당은 논의 단계마다 불참하거나 몽니를 부렸다. “상법이 개정되면 국내 기업이 해외 자본에 먹잇감이 될 것”이라거나 “소송 증가로 경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재계 논리를 되풀이했다. 이런 여당과 어떻게, 얼마나 더 협의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반대 논리는 빈약하다. 이사회가 모든 주주의 이익에 충실해야 한다는 규정과 ‘해외 자본에 먹잇감이 된다’는 주장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멀쩡하던 이사들이 갑자기 회사 주식을 외국인에게 팔아넘기도록 홍보라도 할 것이란 말인가. 소송 급증 우려도 황당하다. 지금도 이사는 충실의무를 진다. 그에 따라 경영한다면 법이 바뀐다고 추가로 소송당할 이유가 없다. 재계와 국민의힘 주장은 결국, 이사회가 대주주를 위해 충실의무에 반하는 경영을 해왔다고 자백하는 꼴에 불과하다.

재계에선 상법 개정 대신 자본시장법 개정을 요구한다. 대주주와 소액주주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지는 때는 기업 인수·합병·분할 등의 자본거래에서만 발생하니 그 부분을 규제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다. 기업 경영 전반을 규정하는 상법이 아닌, 자본거래를 규율하는 자본시장법 규제를 보다 촘촘히 하자는 주장이다.

일면 타당해 보이지만,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자본시장법은 이미 누더기가 됐다. 규제에 규제를 더해도 신종사기수법을 따라잡지 못했다. 인수·합병이나 분할 과정에서두 기업의 주식가치를 부당하게, 편파적으로 계산하는 방법은 오늘도 새롭게 개발된다. 한국 사회는 그간 수많은 부당 평가를 경험했다. 상장사의 비상장사 인수, 상장사 분할 후 비상장 상태에서의 합병, 심지어 상장사와 상장사의 합병에서도 우리는 기상천외한 부당 평가를 목도했다.

핵심 문제는 이해상충이다. 총수 이익을 대변하는 이사회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대주주 이익만 대변하는 한, 그 무슨 대단한 자본시장법이나 시행령이 나온다 한들 파훼법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코리아디스카운트 해소나 진짜 밸류업은 세제혜택이나 인센티브 따위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상충이 가져온 온갖 불법과 탈법을 해소하는 것이 핵심이다. 상법 개정은 그 출발점이다.

정치권은 보완 입법도 속도를 내기 바란다. 이번 개정안에서 빠진 독립이사 확대, 감사위원분리선출, 지배주주·특수관계인 의결권 제한,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과제도 속도감 있게 논의해야 한다.

애매모호한 경영판단의 원칙도 법제화가 필요하다. 이사가 합리적 근거에 따라, 권한 내에서 의사결정을 했다면, 회사나 주주가 손해를 봤다 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게 경영판단의 원칙이다. 대법원에 여러 판례가 있다고는 하나 보다 명확한 규율이 필요하다. 이사의 행위기준을 규정한 미국의 ‘모범회사법(RMBCA, Revised Model Business Corporation Act)’과 같은 법적·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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