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극우파시즘이라는 낯선 세계] 갑자기 파시즘의 문지방을 넘고 만 한국의 극우

릴레이 기고④ 유럽과 한국의 극우 비교

편집자주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에 따른 내란 사태는 1월 19일 서부지법 폭동을 거치며 극우파시즘의 발호를 안팎에 과시했습니다. 수면 아래에 있던 극우세력의 음모론적 주장과 폭력적 양태가 거리를 채우고, 보수여당마저 끌려가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극우파시즘이라는 낯선 현상에 많은 이들이 당황하고 걱정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적 통치와 달리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중국타도와 부정선거를 외치는 오늘의 극우파시즘은 낯설고 당혹스럽습니다.
윤석열이 탄핵되고, 여당의 재집권이 저지돼도 극우파시즘의 폭주가 제어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극우파시즘이라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깊이 파악하는 것이겠습니다.
그간 여러 방면에서 관련 문제를 다뤄온 연구자, 전문가들의 기고를 몇 차례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극우 파시즘을 넘어 더 진보하고 진화하는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최근 독일 총선 결과에서 보듯이, 유럽에서 극우 정치세력의 성장과 집권은 이제 예외사태가 아닌 일상의 풍경이다. 한편 지구 반대편인 이곳에서도 대통령의 느닷없는 친위쿠데타 시도 이후, 극우 담론과 대중운동이 갑자기 일상적 현상이 되어버렸다. 유럽과 한국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이런 극우 정치의 부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같은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극우 세력 득세에 맞서는 과정에서 이런 비교가 우리에게 어떤 시사를 던져주는가?

이 이야기를 풀기 전에 우선 거쳐야 하는 논의가 있다. ‘극우파’와 ‘파시즘’의 개념적 구분이다. 요즘 이 두 말이 서로 구별 없이 혼용되지만, 둘은 명확히 다르다. 극우파는 파시즘보다 더 큰, 다양한 흐름을 포괄하는 용어이고, 파시즘은 극우의 한 부류다. 극우파라는 범주 안에는 왕정복고파도 들어가고 여러 종교 근본주의도 포함되며 강경 신자유주의, 민족지상주의, 권위적 국가주의, 반공지상주의, 우파 포퓰리즘 등도 속한다. 파시즘은 이런 여러 극우 흐름 가운데 한 가닥,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가닥이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앨리스 바이델(C) 공동대표가 2월 24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전날 치러진 총선 정당투표에서 CDU·CSU 연합이 28.6% 득표율로 1위를 한데 이어 극우성향 AfD가 20.8%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집권 SPD는 16.4%, 녹색당은 11.6%, 좌파당은 8.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뉴시스

왜 ‘가장 극단적’인가? ‘파시즘’ 자체가 논자에 따라 상이하게 쓰이는 논쟁적 용어이기에 논의가 꼬일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직접적 공격과 그 파괴가 파시즘의 핵심 특징이라 본다. 모든 극우 세력은 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가 아닌 그 반대 방향에서 현실의 해결책을 찾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거제도나 대의기구 같은 기존 민주주의 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실제로 타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사상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민족사회의자들(나치즘)은 달랐다. 이들은 선거로 성장하거나 집권하고는 선거를 폐지했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연유하는 ‘파시즘’이라는 규정은 이들처럼 자유주의-민주주의의 기본 토대를 무효화하려는 지향과 의지가 있느냐는 기준에 따라 적용되어야 한다.

이 점을 감안하면서 유럽과 한국의 극우파를 비교해보면, 묘한 엇갈림이 눈에 띈다. 유럽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2008년 금융위기 이후부터 극우파가 꾸준히 성장해왔다. 그렇기에 대중적 기반도 탄탄하며, 이념과 담론도 나름대로 세련되게 발전해왔다. 이런 현대 유럽 극우파는 대체로 우파 포퓰리즘 성향을 보이며 성장했고, 지금도 이런 성향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상태다. 반면에 한국 사회에서 지금 문제 되는 극우 흐름은 12.3 친위쿠데타 이후 갑자기 정치 무대 중심으로 난입했다. 그런 탓에 생각과 행동, 조직과 전략 모두 아직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유럽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처음부터 파시즘의 문지방을 무참히 넘어 버린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를 좀 더 살펴보자. 역사적 계보만 놓고 보면, 유럽 극우파는 파시즘과 훨씬 더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이탈리아 집권당인 이탈리아형제당(FdI)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무솔리니의 계승자임을 자부하며 등장한 이탈리아사회운동당(MSI)에 뿌리를 둔다. 프랑스에서 집권을 노리는 국민결집(RN)의 전신 국민전선(FN)은 이탈리아사회운동당을 모델 삼아 출범했으며, 현 대표 마린 르펜의 아버지이기도 한 창당 주역 장 마리 르펜은 독일에 굴종하던 비시 정부를 공공연히 옹호하며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가 하면 스웨덴에서 제2당으로 급성장한 민주당(SD)의 창당 주역들은 네오파시스트 운동에 활발히 참여한 전력이 있다. 그래서 현재 서유럽 여러 나라 극우파는 ‘포스트 파시스트’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포스트 파시즘’은 강조점이 ‘파시즘’에 있을 수도 있지만, ‘포스트’에 있을 수도 있다. 즉, 파시즘의 핵심 특징인 민주주의의 파괴를 실제로 시도할 수도 있지만, 두 세대 넘게 서유럽을 지배해온 민주적 합의의 틀 안에서 극우적 신조(경제적 국수주의, 반이민-반무슬림 등)를 실현하려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할 수도 있다. 이 두 선택지 가운데, 유럽 극우파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후자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즉, 유럽 극우파는 우파 포퓰리즘과 파시즘을 가르는 경계선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우파 포퓰리스트도 과거의 무솔리니처럼 이민족과 ‘빨갱이’에 맞선 민족의 단합을 외치고,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마찬가지로 무슬림 이주민을 ‘내부의 적’으로 지목한다. 그럼에도 우파 포퓰리즘 세력은 이 모두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주장한다. 이민족이나 이주민과 결탁한 엘리트에게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극우 담론의 정당성을 확보하며, 지지층을 규합한다. 민주주의가 거추장스러운 유산이나 적들의 무기에 불과하다며 노골적으로 이를 부정하는 고전 파시즘과는 구별되는 태도다.

물론 자기만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우파 포퓰리스트의 말과 행동에는 기만적인 구석이 있다. 자기편만 민주주의이고 반대편은 무조건 반민주주의라는 입장은 결국 반대편과 공존하길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어느 때든,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이 공존해야 하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돌변할 수 있다. 그러나 사악해질 위험을 내포한 상태와 진짜 사악한 행동을 마음껏 자행하는 상태는 분명히 다르다. 현재 유럽 극우파는 이 두 상태 사이의 경계선을 뚜렷이 의식하면서 우파 포퓰리즘의 한계선 너머로 나아가는 것은 자제하고 있다.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이 경계선이 결국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어쨌든 유럽 극우파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문지방을 넘지는 않고 있다.

유럽과 달리 단번에 파시즘의 문지방까지 넘은 한국 극우파

이와 대조해보면, 현재 한국 극우 흐름의 기이한 특징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한국은 유럽 여러 나라보다 더 가까운 과거에 파시즘 체제를 경험했다. 유신 정권과 제5공화국은 고전 파시즘과는 좀 다르지만 군부 파시즘이라 할 만한 체제였다. 선거제도나 대의기구 같은 민주주의의 골간이 무너진 체제였다. 그러나 제6공화국으로 전환하고 나서 작년 12월 3일까지는 파시즘의 실질적 위협 없이 대의민주주의를 유지해왔다. 사회 곳곳에 극우적 요소들이 유럽보다 훨씬 강하게 남아 있기는 했지만, 최근 10년 정도 시간대로 보면 유럽에 비해 극우파의 독자적 세력화가 활발하게 전개됐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윤석열이 정권 위기를 친위쿠데타로 돌파하려는 기상천외한 만행을 시도한 뒤에는 사회 곳곳에 산재한 극우적 요소들(혐중, 반페미니즘, 극우 개신교회 등등)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결집해 유럽과 비슷한 강도의 극우 물결로 쇄도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한국 극우 정치는 처음부터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문지방을 넘어선 채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윤석열의 기괴한 모험에 의해 촉발됐기 때문에, 우파 포퓰리즘 세력으로서 성장해가는 과정은 거치지 않은 채 갑자기 기존 민주주의 제도 파괴를 공공연히 주장하거나 지지하는 세력으로 출현하고 말았다. 그래서 12.3의 충격은 한 달 만에 1.19 법원 공격 난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부정선거’ 음모론이라는 요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편이 진 선거는 모두 부정선거’라는 논리(실은 몰-논리)가 ‘그런 선거로 구성된 민주주의 제도 따위는 부정해도 된다’는 정서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서는, 약간의 선동이나 조직력만 추가된다면, ‘그 따위 민주주의는 파괴해도 좋다’는 파시즘의 정신세계로 직행할 수 있다. 지난겨울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가능성이 갑자기 열려 버린 탓에, 현재의 혼란이 탄핵 인용이나 조기 대선 이후에도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가중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떨쳐 버리기 힘들다.

윤석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이 열린 18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5.01.18. ⓒ뉴시스


다만 이렇게 돌연 급조된 세력이기에 유럽 극우파에 비해 한계나 약점도 크다. 지금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거나 ‘부정선거’론에 동조하는 여론은 계급, 계층을 가리지 않고 늘어나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극우 흐름이 특정한 계급, 계층에 깊이 뿌리내리지는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유럽 극우파는 나름 착실한 성장 과정을 밟았기에 구 중간계급이나 노동계급 내 특정 부문에 탄탄한 지지 기반을 구축해놓고 있다. 이런 구심력을 갖춘 정치 세력은 쉽게 극복될 수 없는 법이다. 극우파의 강력한 영향력이 향후 유럽 정치의 상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한국 극우파는 당장의 위험성은 유럽보다 크더라도 현재적, 잠재적 역량은 ‘아직’ 굳건하지 못한 셈이다. 극우파는 한국 정치에서 익숙한 경로인 온라인 네트워크나 개신교회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세를 불려 나가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 특정한 계급, 계층이 지지를 보내야만 할 구체적 근거를 지닌 세력으로까지는 부각되지 못한 상태다. 이 상태야말로 파시즘에게 미래를 내주지 않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다. 윤석열이 일단 뿌려놓은 파시즘의 씨앗이 사회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할 기회다.

그렇기에 내란 진압 이후, 내란 동조 세력을 제외한 정치권 전체가 반드시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는 현재 경제 침체의 고통을 가장 심각하게 체감하는 계급, 계층을 위한 긴급 개혁 조치다. 예컨대 팬데믹 이후 계속 누적된 부채에 신음하는 영세 상공인, 가뜩이나 불안정한 삶이 더욱 불안해지고 있는 플랫폼 노동자 등의 고통을 경감하고 권익을 확대하는 단호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반파시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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