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극우파시즘이라는 낯선 세계] 대통령만 바라보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내란이 끝난다

릴레이 기고⑤ 파시즘과 전제주의

편집자주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에 따른 내란 사태는 1월 19일 서부지법 폭동을 거치며 극우파시즘의 발호를 안팎에 과시했습니다. 수면 아래에 있던 극우세력의 음모론적 주장과 폭력적 양태가 거리를 채우고, 보수여당마저 끌려가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극우파시즘이라는 낯선 현상에 많은 이들이 당황하고 걱정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적 통치와 달리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중국타도와 부정선거를 외치는 오늘의 극우파시즘은 낯설고 당혹스럽습니다.
윤석열이 탄핵되고, 여당의 재집권이 저지돼도 극우파시즘의 폭주가 제어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극우파시즘이라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깊이 파악하는 것이겠습니다.
그간 여러 방면에서 관련 문제를 다뤄온 연구자, 전문가들의 기고를 몇 차례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극우 파시즘을 넘어 더 진보하고 진화하는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정말로 '극우 파시즘의 발흥'인가. 이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파시즘'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다른 과학적 개념들이 그렇듯이 파시즘 개념 또한 엄밀하게 규정할수록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현상들에 적용하기 어려워지고, 반대로 느슨하게 정의할수록 포괄되는 대상들이 너무 많아져 별다른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어떤 경우든 파시즘을 개념적으로 규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정작 그것을 현실에 적용할 수 없게 되는 기묘한 사태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파시즘은 엄밀한 학술적 개념보다는 '욕설'로 사용되어 왔다.

욕설에 가까웠던 이 단어가 현실성을 얻게 된 건 12.3 친위쿠데타 시도와 1.19 서부지법 폭동사태였다.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도 충격적이었는데 그런 대통령의 구속에 항의하여 지지자들이 서부지법을 점거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파시즘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오래 전 일을 분석하는 개념이 아니게 되었다. 중국인, 조선족, 화교 등에 대한 혐오발언, 가짜뉴스를 전파하는 유튜버들, 거기에 동조하는 여당 의원들 등을 보고 있자면 나치즘의 상징과도 같은 유태인 학살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실제로 약 1백년 전에 식민지 조선에서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중국인들을 공격한 화교배척 폭동 혹은 배화폭동(排華暴動)으로 수많은 화교들이 희생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런 일이 재현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3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학교 정문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조커 분장을 한 채 발언하고 있다. 2025.3.3 ⓒ뉴스1

극우적 대중집단을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 극우적인 대중집단을 '파시즘'이라 선뜻 규정하기 어려운 건 그러한 시도가 자칫하면 이 사태를 낳은 구조적 요인을 도외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멀게는 1987년 이래의 한국 정치구조의 변동 과정을, 가깝게는 노무현 이래의 변화를 파악해야만 한다. 한국의 정치구조는 인구구조, 정치구도의 변화 등의 요인들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며 변해왔다.

1987년 이후 한국 정치구조의 변동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분점(分占) 정부의 출현이다. 분점정부란 대통령제 하에서 행정부를 차지한 정당이 의회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누리지 못해 서로 다른 정당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나누어 차지하고 있는 상황을 뜻한다. 흔히 쓰는 표현으로 '여소야대' 현상을 지칭한다. 반대로 '단점정부'란 말 그대로 하나의 정당이 의회에서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해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를 장악한 상태를 의미한다. 여대야소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1987년 이전의 권위주의 체제는 통치의 안정성을 위해 여대야소, 단점정부적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왔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대체로 대통령의 소속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분점정부적 상황이 반복해서 출현했다. 노태우 정부를 비롯한 집권여당들은 분점정부적 상황을 타파하고자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당들간의 합종연횡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정국개편을 꾀했다. '3당합당'이나 '신한국당-자민련 연합', 'DJP 연합'과 같은 지역주의 정당들간의 연합이 대표적인 사례다.

분점정부적 상황이 지속되는 경향은 노무현 정부를 기점으로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노무현 정부를 기점으로 하여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등은 정권교체기와 같은 과도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단점정부의 상태를 유지해왔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정치구조는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의 단점정부적 상태가 1987년 민주화를 기점으로 붕괴한 이래 2002년 노무현 정부까지 분점정부적 상태를 유지하다가 노무현 정부 이래로 점차 단점정부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와 같은 변화의 원인은 무수히 많겠지만 대표적인 원인은 '인구구조의 변동'에 따른 지역주의 구도의 변화가 아닐까 한다. 1987년 이후의 네 번의 총선(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에서 예외 없이 모든 집권여당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수를 차지하는데 실패한 이유는 갈등구조 자체가 (영호남) 지역주의를 축으로 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주의 정당들 간의 이합집산 속에서 여당이 처음부터 다수연합을 창설하기란 쉽지 않았다. 집권 이후의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통해 새로운 지배연합을 창출하는 과정이 반복되었고, 이 시대를 대표한 정치인들이 바로 '삼김(三金)'이었다.

의회 '내부'에서의 이합집산을 통해 분점정부적 상태를 극복하려 했던 삼김시대와 달리, 2002년 이후에는 노사모와 같이 디지털 포퓰리즘에 기초한 대중집단이 의회 "외부"에서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대중들의 압박 속에 정당은 점차로 대통령의 지배를 뒷받침해주는 플랫폼 기구로 전락하였다. 기존의 영호남 지역주의의 구도 위에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디지털 포퓰리즘이 얹혀지며 정치의 향방을 결정지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수도권 인구집중의 결과, 수도권의 인구비중이 비수도권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즉, 이전의 영호남 지역주의와 수도권의 인구비중의 변화가 중첩되면서 단점정부로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정치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총선에 대패해 단점정부 형성에 실패하자 정치 전복을 꾀한 윤석열

이처럼 의회를 우회하여 지지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대통령과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적 지도자와의 일체 속에서 정치적 효능감을 실현하고자 하는 대중집단의 결합은, 대통령에게 더 많은 힘을 몰아주어 더 빠른 정치적 결과를 만들고자 하였다.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일을 가로막는 일은 단순 방해를 넘어 해당행위나 이적행위로 간주되어 보복을 받았다. 선거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의원들은 점차로 대중의 여론에 편승하여 대통령을 결사옹위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에 따라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 또한 견제와 균형보다는 '당정일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대통령에게 모든 힘을 몰아주어 그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주고자 하는 이 대중적 정치운동을 나는 '전제주의'라 부른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 있어 윤석열 정부가 어떤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면 노무현 정부 이후 단점정부를 형성하는데 실패한 최초의 정부라는 데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 총선에서 대패해 단점정부를 형성하는데 실패한 윤석열 정부는 입법부를 장악한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과의 대립 관계를 폭력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경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해소하려 하였다. 대통령을 제약하는 정치적 구조 자체를 전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2.3 친위쿠데타는 전제주의의 최종적 귀결점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의 유권자들이 진보·보수 상관없이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불일치 상태를 거부하며 단점정부 상태를 선호해왔다는 점이다. 지금 거리에 나와 있는 극우 대중들이 항상 하는 얘기도 '입법독재'이다. 대통령이 무언가를 해보고자 하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방해를 하냐는거다. 심지어 윤석열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 중에서도 민주당이 탄핵을 남발해 대통령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어째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해는 하지 말자. 나는 지금 국민의힘의 극우적 대중운동과 조국 사태 이래의 민주당의 대중운동이 '똑같이 잘못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가령 이재명 대표 또한 과거에 부정선거 음모론을 설파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부정선거 음모론은 민주당 내부에서 토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폐기되었으며 이재명 대표 또한 당론이 그리 결정된 뒤로 더 이상 부정선거를 논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민주당은 그 내부에 음모론을 걸러낼 수 있는 기능이 존재한다. 반면에 국민의힘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여러 의제들을 걸러내지 못한다. 대선후보를 외부에서, 그것도 민주당 정부에서 검찰총장을 역임하던 이를 용병으로 데려와 내보내는 정당 아닌가. 당내에서 대선후보급의 인재를 길러내지도, 그렇다고 정치적 의제를 조직하지도 못하고 음모론을 공론장에 끌고 오는 국민의힘은 사실 내란수괴보다도 더 위험하다. 단순한 선거 플랫폼으로만 기능하는 국민의힘을 이용해 파시즘적 정치인이 정말로 순식간에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일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상목 권한대행을 비롯한 행정부는 국민의힘과 극우적인 대중운동의 지지를 받으며 민주당의, 더 정확하게는 민주당이 장악한 입법부의 견제와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권한대행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부는 정치적 혼란을 틈타 의회의 통제없이 여러 정책들을 자의적으로 관철시키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제재마저도 무시하고 있다.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제한하기 위한 법치주의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이제는 사법부마저도 별다른 법적 근거 없이 윤석열을 석방하며 법을 왜곡시키고 있다.

입법부와 사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행정부의 '독재', 법적 미비를 활용한 사법부의 독단적인 판단, 법적용을 왜곡하는 법기술자들의 활약, 극우적인 대중들의 폭력사태, 이런 행위들을 정당화하고 퍼뜨리는 집권여당 등등. 지금의 사태는 입법부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기구들이 집권여당과 극우적 대중들의 지지 하에 입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대통령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음에도 '계몽령' 운운하며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은 파시즘보다는, 대통령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고자 하는 '전제주의'에 가깝다. 그 전제주의가 심화되면서 입법부의 통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 카를 마르크스는 유럽이 '공화정이냐 코사크(야만)이냐'의 갈림길에서 "코사크적 공화정", 즉 나폴레옹 3세가 입헌적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개인적 독재를 수립한 '야만적 공화정'을 택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은 지금 민주적 공화정이라는 '외피'를 벗고 입법부의 통제로부터 행정부가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코사크적 공화정'으로 이행하고 있는 듯하다. 그걸 국민의힘과 극우적 대중들이 선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민주당과 국힘당에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 기각을 촉구하고 있다. 2025.03.09. ⓒ뉴시스

대통령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들려는 '전제주의'

그렇지만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자 하는 전제주의적인 특질이 노무현 정부 이래 강화되어 왔으며 그 끝에 12.3 친위쿠데타와 1.19 서부지법 폭동 사건이 있다. 대통령이 내란을 획책해도 열렬하게 지지하는 극우적 대중들에게도 분명 일정한 정도의 '해방적' 잠재력이 있을 것이다. 저들 또한 어떤 의미에서 '민중'이라 할 수 있으며 부르주아적 대의제 기구로부터 배제되고 억압된 정치적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욕구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과정을 통해 해소되지 못하고 대통령과 같은 정치인 개인과의 강렬한 일체감을 통해 해소된다는 데에 있다.

이 전제주의적 특질은 단순히 검찰을 해체한다든지, 판사를 탄핵한다든지 하는 걸로 해소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교체된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질문이다.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라는 통렬한 질문이 필요한 시기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적 지도자 개개인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대통령에게 모든 힘을 몰아주고 그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욕구를 해소하고자 하지 않아야 내란의 밤이 끝날 수 있다. 오직 대통령만이, 행정부만이 자유로운 전제주의의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가 정치적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의회와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어야 한다. 그 과정은 우리 정치를 '파시즘'이 아니라 "전제주의"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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