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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기독교국가론 이전에 회개부터 하라

“이승만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김구는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중국 국적을 취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국적 없이 독립운동을 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이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북한 공산당에 점령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지난 3월 4일, 부산에 설립된 비인가 대안학교 세계로우남기독아카데미(이승만아카데미)개교식 현장에서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가 쏟아낸 말이다. “일제하의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김문수)이라는 말도 나오는 터에, 김구와 이승만의 국적을 따져 누가 더 독립운동에 옳게 헌신했는지를 따지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굳이 따지자면 김구는 일본군에게 총살을 당하거나 체포될 수도 있는 위험한 전쟁터에 있었고 이승만은 태평양 건너 미국이라는 안전한 나라에 있었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가 3월 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여의대로에서 열린 '세이브코리아 3·1절 국가비상기도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손 목사는 매주 여의도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기독교 단체 ‘세이브코리아’의 대표다. 전광훈과 함께 개신교 내 극우화 흐름을 선도하고 있는 손 목사와 세이브코리아의 우선 목표는 탄핵을 저지하는 것이지만, 이들의 궁극 목표는 “기독교인들의 출산율이 일반 시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교회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만 되면 한국은 자동적으로 기독교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손 목사의 말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꿈은 손 목사가 최초이지 않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부터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던 최초의 인물은 이승만이다. 손 목사가 세계로우남기독아카데미(이승만아카데미)를 세워 학생들에게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숭앙하려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적통을 임시정부가 아닌 이승만과 ‘1948년 남한 단독 정부’로 삼으려는 우파와 역사 인식을 함께 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속내는 이승만이 실패했던 미완의 기독교 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한 것이다.

개신교는 이 땅에서 어떻게 거대한 종교집단이자 정치집단이 될 수 있었는가. ‘기독교=문명화’라는 등식이 당대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아사미 마사카즈와 안정원이 함께 쓴 『한국 기독교, 어떻게 국가적 종교가 되었는가』(책과함께,2015)에서 한 대목이다. “조선 사람들은 청일전쟁을 통해 근대화된 일본이 청나라를 물리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하여 전통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서양적 근대화는 곧 기독교로의 전향을 의미했던 것이다. 사실 항일운동의 중심이던 독립협회 지도자의 대다수는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136쪽)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후까지의 기간에 개신교회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원래대로라면 서양에서 들어온 개신교회를 한반도에 진출한 제국주의 열강의 앞잡이라고 간주하여 배척할 수도 있었으나, 항일의식이 그러한 감각을 없앴다. 교회는 영미권 선교사들의 감독 아래에 있었기에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이 그들의 보호를 이용하여 교회를 민족운동의 통로로 삼았다. 3·1운동 당시 개신교인들은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개신교 인사가 16명을 차지했고, 시위 중 체포·구속된 사람 중에도 개신교인이 압도적이었다. 3·1운동은 개신교가 ‘민족교회’의 이미지를 얻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독립운동가 모두가 기독교인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기독교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독립’이라는 정치 목표, 그리고 ‘민족적 고난’으로부터 구원된다는 선민사상과 결합됨으로써 민족의식을 각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기독교가 한국의 민족종교라는 색채를 띠게 되었다.”(203쪽) 3ㆍ1운동 이후 개신교계에서 정치 방면의 민족운동은 사라졌지만 부흥운동과 함께 농촌운동, 계몽운동, 절제운동과 같은 온건한 형태의 사회참여 운동은 지속되었다. 일제는 교회가 독립운동을 지휘한다고 보고 탄압했다.

해방이 되자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미군과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미군과 함께 재입국한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통역에서부터 군정청 중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군정청과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미국 선교사들이 다시 귀환하는 것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군정청에 한국에 대한 정보와 한국인 인맥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일제하의 한반도에 ‘정교 분리’의 입장을 견지했으나, 해방 후 미군 당국과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과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졌고, 그 협력 관계로 ‘기독교’와 미국의 ‘민주주의’의 확산을 동일시했다. 해방 후 미군 통치 책임자였던 맥아더와 호지[하지]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와 기독교 선교를 구별하지 않고 미 국무성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할 정도로 기독교화를 강력하게 지원했다. 선교사들은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을 군정청에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일제 강점기에 미국에 다녀온 유학생 태반이 기독교 신자이거나 기독교에 우호적인 사람들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야말로 그 전형이었다.”(154~155쪽)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1945년 9월 7일 발표한 포고 제1호에서 “조선인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할 것을, 또 같은 해 9월 29일 발표한 군정청 법령 제6호에서 “종교의 차별이 무(無)함”을 고시했다. 그러나 강인철의『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한신대학교출판부,2013)를 보면 더글러스 맥아더와 군정청은 거짓말을 했다. 군정청은 불교와 유교에 과도한 규제와 함께 사찰과 향교의 재산을 빼앗았던 반면 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르는 기독교계에는 특혜를 주었다. “공식적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관철된 ‘그리스도교 우대’ 방침이 1945년 8월 이후 한반도를 지배하는 ‘새로운 탈(脫)식민지적 종교정치 질서’로 자리 잡은 것이다.”(31쪽) 기독교계 인구가 1%도 차지하지 못하는 남한의 다종교 상황에서 “많은 군정 고위 관리들은 그리스도교 정신에 기초하여 건국을 추진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42쪽) 도쿄를 차지한 새로운 천황 맥아더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낙점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뉴시스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이 취임 이후 처음 내린 포고령 중 하나는 10월 17일 제주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4·3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살상극은 적게는 1만4000명, 많게는 3만명의 제주 주민을 학살하고서야 끝이 났는데, 군인·경찰과 함께 이 학살극을 저지른 또 다른 주요 행위자는 한경직이 세운 영락교회가 조직하고 평안도에서 내려온 청년 신도로 이루어진 서북청년단이다. 한국 교회는 악마나 같았던 이들의 잘못을 단죄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다. 김진호는 『극우주의와 기독교』(홀가분,2024)에서 “이 청산되지 못한 범죄의 기억은 언제곤 다른 이름으로, 다른 전사 조직으로 무장하면서 부활할 수 있다”(96쪽)고 경고한다. 손 목사와 세이브코리아는 기독교국가론을 운운할 게 아니라, 내란범 옹호를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반공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고 했던 이승만과 청년 개신교 신도들이 제주에서 저지른 살인극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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